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하루 Nov 18. 2018

들어는 보셨나, 범성애자!

호랑이 좋아하는 거 아닙니다 (정색)

  서울, 인천, 제주, 부산 등 여기저기서 퀴어퍼레이드가 열릴 때마다 언론이 한바탕 뒤집어진다. "동성애자들의…" "…문란한 동성애…" "아이들에게 항문 성교를…"따위의 물 밀듯 밀려오는 제목들을 보다보면 꼭 복창이 터진다. 터지는 속을 부여잡고 어떻게 대충 꼬매보려고 하다가도 다 패대기 치고 만다. 도대체가 언제까지 동성애만 붙들고 늘어질 셈이냔 말이다!


  나는 범성애자(Pan Sexual)다. 제목에서도 말해뒀지만 호랑이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젠더의 사람들에게 연애 감정을 품을 수 있다. 결국 남자도 여자도 좋다는 거 아니야,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양성애자(Bi Sexual)과는 다른 지향성이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단어들에 대해 조금 쉽게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단어 정리가 필요하다.


▲ 범성애자 (Pan Sexual)을 상징하는 깃발.


  우리는 '성' 이라는 단어를 섹스와 젠더로 구분한다. 전자의 경우는 정말 단순하게 생식기의 모양새를 가지고 인류를 둘로 분류하는(종종 둘 모두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성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보편적으로 쌓아올려진 성(姓)에 대한 인식, 즉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성을 말한다. 이 '젠더'라는 개념을 빼놓으면 아무 이야기도 할 수가 없는데 이 단어가 참 많이 어렵다. 그러니 우선은 가볍게 예시를 들어보자.


  누군가는 자지를, 누군가는 보지를 달고 태어난다. 이때만 해도 이 둘에게는 생식기의 모양 이외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라날 때, 사람들은 자지를 달고 태어난 아이들의 앞에는 파란색 계열의 장난감들을 놓아주고 보지를 달고 태어난 아이들의 앞에는 분홍색 계열의 장난감들을 놓아준다.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말로 아이들을 옭아맨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인 사건들은 단순히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을 '젠더(Gender)'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라는 동안 사회의 시스템에 순응하게 되어 스스로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정체화한다. 이때 일부의 사람들은 본인이 과연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혹은 자신에게 남성과 여성의 젠더가 둘 다 있다고 생각하거나, 남/여를 제외한 다른 젠더가 존재하고 그게 본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성 정체화의 과정이며, 젠더라는 건 결국 인간이 만든 시스템에 불과하기 때문에 생기는 빈틈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다시 말해 범성애자는 시스젠더(신체와 젠더가 일치하는 사람들)를 포함한 다른 모든 젠더에게도 연애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동성애자는 자신과 동일한 젠더에만, 양성애자는 둘 이상의 젠더에 연애 감정을 품을 수 있다. 양성애자의 경우 이성과 동성 중 어느 쪽에 더 많은 끌림을 느끼느냐에 따라서 호모 플렉시블(동성에게 더 많이 끌림을 느낌) / 헤테로 플렉시블 (이성에게 더 많이 끌림을 느낌)로 나누어진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잠재적 연애 대상의 범주를 인식하게 되면 그것을 성 지향성이라고 부른다.


  나는 범성애자다. 나는 상대방이 본인을 여자라고 생각하든, 남자라고 생각하든,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하든, 여자인 동시에 남자라고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젠더는 나의 연애 감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범성애자는 아직까지 성소수자 중에서 크게 가시화되지 않은 지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퀴어 퍼레이드가 문란하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 사실 문란하다, 는 단어 자체의 정의가 무척 모호함에도 - 가는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퀴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헤테로(이성애자)들은 본인들의 존재를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보통 타인에게 애인이 있는지 물어볼 때 남자에게는 여자친구 있으세요?, 여자에게는 남자친구 있으세요? 라고 말을 꺼낸다. 상대방이 이성애자일 거라는 추측을 기반에 깔고 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상대방이 성소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소수자들은 그렇게 지워진다.


  성소수자들은, 퀴어들은 "내가 여기 있어요!"라고 줄곧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내가 여기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몇 번이고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내가 본의 아니게 가족에게 커밍아웃 했을 때, 엄마의 반응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성소수자일 수 있느냐" 였던 걸 떠올려보면 퀴어 안에서도 다양한 지향성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이해시키기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즉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헤테로이든 퀴어이든 아마 여러분과 별다를 것 없을 연애담.


그 연애담을 읽고 난 후 당신의 인식이 조금은 달라져 있을까?


▲ In the end, Only Love Win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