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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리 Nov 07. 2024

11월 첫째 주 일상 톺아보기

둘 다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편은 아니라 집데이트를 하거나 동네 마실을 나갔다. 남자친구가 닌텐도 스위치 세트를 가져와서 TV에 연결했다. 오랜만에 하는 게임이라 재밌었다. 배우는 게 느려 진짜 못했는데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나 때문에 계속 지니까 화나지 않냐고 물었는데 고작 게임 때문에 너한테 화를 내겠냐고 대답하던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다음 주는 월요일이 휴일이라 어디를 갈까 하다 동물원에 가기로 했다. 회사 동료에게 얘기하니 대학 졸업한 20대 중반이 데이트로 동물원을 가냐고 막 웃었다. 귀엽다고. 닌텐도 스위치 얘기를 하니 아주 뒤집어졌다. 아침 일찍 가 동물을 볼 생각에 설레고 오랜만에 가는 나들이다 보니 기분이 좋다. 남자친구는 모든 일에 진심이라 놀이공원을 가도 딱 5분 쉬고 모든 기구를 타야 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일을 하는 데 늦은 때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5년 뒤면 서른이라고, 다시 공부를 하면 자격증을 딸 때는 서른이라고 한숨을 쉬면 그는 stop it, 딱 잘라 얘기한다. 그게 뭐 어떠냐고, 자기도 대학 졸업하고 또 공부하고 있지 않냐고 말하면 부담감이 좀 옅어진다.


땡스기빙 연휴에는 샌프란시스코를 가기로 했다. 저번 주에는 자기가 돈이 없으니 여행 경비는 다 네가 내야 할 텐데 그건 좀 불공평하지 않냐고, 취직을 할 때까진 여행은 가지 말자고 하더니 어디서 돈이 생겼다고 내게 카드를 내밀었다. 나라면 꽁돈이 생겼다면 모아놨다가 다른 데 쓰거나 내가 하고 싶은 데에 쓸 텐데, 그는 쿨하게 카드를 주며 호텔을 예약하라고 했다. 500불 이내로만 쓰면 된다고, 네 마음대로 하란다. 이런 그가 신기하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반성도 되었다. 한 장에 70불인 동물원 티켓까지 끊고 나머지는 네가 내란다. 나머지 낼 게 뭐가 있냐고, 너 그럼 여행에서 비싼 거 많이 먹으라고 하자 삼시세끼 인앤아웃만 먹겠단다. 우리 둘이 햄버거 세트 3개를 시켜도 20불이면 끝나는 그런 곳. 그럼 불공평하다고 얘기하자 I don't care 이라며 화제를 돌렸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가 신기하다.






남자친구는 절대로 빈 말을 하지 않는다. 온몸에서 맹렬히 거부하는 듯하다. 너무 팩트만 말해 싸운 적도 많다. 내 팔이 굵냐고 묻자 그렇진 않은데 뺄 지방이 보인다고 말했다던가. 파스타를 만들어줬는데 면이 덜 익었다며(내 기준에선 충분히 익었다) 지적을 한다던가. 그래도 걱정은 안 된다. 싫으면 싫다고, 안 한다고 딱 잘라 말할 사람이라서, 이 사람의 본심을 의심하는 일은 없다. 칭찬도 잘 안 한다. 맨날 뭐 물어보면 it's okay라고 대답하는데, 가끔 very nice라고 말하면 정말 뿌듯하다. 내년 땡스기빙에는 자기 형과 같이 계획을 짜보자는 말을 할 때, 내년에 내 부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몸을 키우고 좋은 직업을 가지겠다는 말을 할 때, 5년 뒤에도 자기 마음이 바뀌진 않을 거라는 얘기를 할 때 그 말이 100% 진심이구나, 너는 나와의 미래를 꿈꾸고 있구나 감동하게 된다. 내 기분을 고려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내가 기분을 상하게 할 땐 I don't like it 직설적으로 얘기하고 뒤끝을 부리지 않아서. 꽁해있거나 대화를 거부하지 않고 미안한 건 미안하다 근데 너도 이런 부분은 사과해 줬으면 좋겠다 직접적이고 투명하게 의사를 전달해서. 한국인인 나보다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자기는 man of his word라며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해서. 만났던 4월부터 11월인 지금까지, 내가 차가 없었던 때에도 1시간 거리를 매주 운전해 날 보고 가던 사람이라서. 자기는 아직 젊기 때문에 괜찮다며 아침에 2시간 거리 놀이공원으로 출발해 하루 종일 놀고 말리부까지 운전해 바다를 보고 케이타운에서 저녁을 먹고 나를 집으로 바래다주던 그라서. 내가 몇 번이나 영화를 보다 졸아도 자기 어깨를 빌려주고 오히려 더 자라고 하는 사람이라서.






내년엔 큰 변화가 있다. 일을 그만두고 공부를 한다. 영주권을 진행하지 않게 되었지만, 트럼프가 당선되어 상황이 어려워지겠지만 과도하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친구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We should celebrate 이라며 웃었다.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도 아니고 근처 인앤아웃가서 햄버거를 먹을 거지만, 내 미래 계획을 진심으로 고민하고 응원해서 고마웠다. "We're gonna celebrate every acheivement of yours." 내 성취를 기뻐하고 축하할 사람이 생겨서, 또 그가 무언가를 이루면 내 일처럼 기뻐할 사람이 나라서 좋다. 솔직히 우리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둘 다 학사를 마치고 또 대학에 간다. 그래도 나는 그와의 미래가 기대된다. 한다면 하는 그를 알아서. 쉽게 포기하지 않는 나를 알아서. 우리는 괜찮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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