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언제부터’.
태어난 지 1년이 넘어서야 말한다. 2년 넘어서야 혼자 먹는다. 주 양육자 있어야 살아남는다. 인간이 그렇다.
*캡틴 판타스틱(2015)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빌은 아이들에게 자연만 보여줬다. 철학 책 읽히고 암벽 타기 가르쳤다. 아이들 공교육 받은 또래보다 똑똑하다. 어눌한 발음으로 말보다 행동 앞선다 얘기한다.
아버지는 아이비리그에 줄줄이 합격한 첫째에게 ‘내 뒤에서 그런 짓 했냐’며 다그친다.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이방인일 뿐이죠!” 처음으로 화를 내본 사람처럼 헐떡이는 호흡으로 소리친다.
정치가 삶인 양육자에게 자랐다. 우리 편은 절대선, 상대 편은 절대악이었다. 시위에 갔고 정치관이 같은 학원 선생님에게 배웠다. 선거에 지는 날은 조심해야 하는 날이었다.
대학에 와서야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배웠다. 무조건적인 ‘우리 편’은 없다. 깨달은 순간 배신감이 몸을 쳤다. 왜 나에게 다른 쪽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왜 다른 쪽을 혐오했을까. 왜 아직도 그게 정답이라 말할까. 엄마 아빠에게 사랑받으려고 노력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특정 채널이나 사람이 나오면 쌍욕부터 내뱉는 집에서 나도 동조했다.
‘모태 종교’도 ‘모태 정치관’도 논쟁거리다. 주 양육자는 아이의 어떤 부분까지 관여하고 결정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보여주어야 할까. 어디까지 선택권을 쥐어 줄까. 언제부터 아이가 ‘컸다’고 말할까. 대답할 수 있을 때 아이를 길렀으면 한다.
프로이트 3세에 모든 것 결정된다 말한다. 동의하지 않지만, 어릴 때 학습된 것 떨쳐내기 어렵다는 건 안다. 무기력이든 불안이든 우울이든 정치색이든 집안 분위기든. 신중했으면 한다. 길 열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