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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May 29. 2023

DAY1. 물

Written by. DKS

 물은 생명이다. 물은 죽음이다. 내 집 앞엔 북한강이 흘렀고 나는 거의 모든 날을 강가에서 보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상관없었다. 봄, 여름, 가을엔 주로 낚시 그리고 겨울엔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썰매를 타며 즐겼다. 주로 여름이면 강가에 텐트를 치고 친구들과 다소 이른 나이지만 밤새워 술 마시고 낮엔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가 낚시를 즐겼다. 그렇게 보내던 어느 여름날 아침 강 건너편에서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장정 서너 명이 배를 타고 강 중심으로 나가 물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강 건너편에서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우리는 자다 말고 일어나서 강에서 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지난밤 서리해 온 수박을 쪼개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강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건너편 사람들이 뱃전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물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우리는 호기심과 걱정으로 강을 바라보았는데 강 건너편에선 난리가 났다. 결국 물속으로 뛰어든 사람 중 한 사람이 나오질 못했다. 우리는 부리나케 배를 끌고 노를 저어 그 사람들 쪽으로 갔다. 도착해 보니 그들 중 한 사람은 결국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해병까지 제대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밤새워 술 마시다가 아침 찬물에 뛰어들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 같다고 한다. 그들은 넋 놓고 우는 사람,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 등 서로 각기 친구의 죽음에 대한 후회와 허망함과 책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을 젖혀두고 나와 친구들은 배 한 대 더 끌고, 두 대의 배 뒷전의 닻에다 구해온 철조망을 묶어 강바닥으로 내려보내 배 두 대가 보조를 맞춰가며 그 사람이 빠진 곳을 기점으로 해서 배를 끌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건져 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두려움이 앞섰다 호기롭게 시작한 일이지만 정작 시체가 떠오르면 어찌할까 걱정도 많이 하였다. 나는 배 뒷전에서 닻을 잡고 다른 쪽 친구와 보조를 맞춰 강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얼마만큼 끌었을까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친구와 나는 내린 닻을 조심스럽게 올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행여 걸린 것이 빠질세라 아주 조심스럽게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가시철망에 죽은 사람 팬티가 걸려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손을 뻗어 시체를 잡아야 하는데 두려움에 아무도 잡지 못하고 떨기만 했다. 망설이다 결국 물 위로 건져 올린 시체를 잡지도 못하고 놓쳐버렸다. 놓친 시체는 물살을 타고 멀리, 더 멀리 떠내려갔다. 창피하고, 민망한 나와 친구들은 즉시 철수하고 우리들이 머무는 강가에 배를 대놓고 두려움에 떨었다. 벌건 대낮인데도 춥고 몸이 떨렸다. 결국 전문적으로 시체를 건지는 먹구리(잠수부)들이 와서 시체를 건져냈다.

강가에 살다 보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를 직접 보았다. 어떤 이들에겐 철옹성처럼 전혀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가볍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바라보면 죽음이란 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선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실현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본인의 자의든, 실수든 우리들 주변엔 언제나 보이지 않은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물이란 사람에게선 없어선 안 될 생명수이다. 마시고, 먹고, 씻고, 늘 곁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나도 커피를 마시고 있지만 대부분 성분은 물이다. 우리는 물을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위의 경우 물을 가볍게 생각하고, 물을 얕보면 결국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교훈이다. 나는 수없이 많은 죽음을 강가에 살면서 목격했다. 오죽하면 한국 응급구조단이란 이름을 단 앰뷸런스가 강가에 상주하면서 그 차를 몰던 “형님” 즉 나와 내 친구들은 “형님”이라 불렀다. 여름이면 이 “형님”은 항상 잊지 않고 왔다 우리들 텐트에 항시 방문하는 사람이었다. 같이 마시고 수박, 참외, 복숭아 서리도 하면서 굉장히 친하게 지냈지만, 알고 보면 죽음 위에 기생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강물에 빠지기만 기다렸다 죽으면 응급으로 실어 나르는, 어찌 보면 곤충의 죽음 위에 기생하는 동충하초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또한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는 건 아니겠지만 결국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처리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산에 가면 큰 나무에 기생하는 담쟁이넝쿨처럼, 소나무에 기생하는 이끼처럼 결국 삶을 위하여 죽음에 기생하는 삶이 있는 것이고, 별 뜻 없는 죽음과, 자의적 죽음 등 모든 죽음이 삶에 기생하듯 모든 삶이 죽음에 기생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삶과 죽음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즉, 내 시점에서 바라본 물은 생명이자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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