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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Jun 14. 2023

DAY7. 연필

Written by. DKS

1) 아버지와의 이별


예전의 연필은 연필심이 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잘 부러졌다. 칼로 깎고 또 깎고 잘 안 써지면 입으로 침 발라서 공책 위에 꾹꾹 눌러서 글씨를 썼던 기억이 난다. 쓰다 보면 키다리 연필이 어느새 몽당연필로 바뀌고 몽당연필을 볼펜 빈 자루에 끼어서 마지막 연필심이 닳을 때까지 썼다. 연필은 연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봉사했다. 필통에 긴 연필 한 자루 있으면 마음이 뿌듯했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왔는데 사촌 형이 술을 잔뜩 먹고 비틀비틀 고함을 지르며 집에 들어오더니 느닷없이 가방 검사를 하겠다고 누나와 나의 가방을 열어보라고 한다. 그때 난 초등학교(국민학교) 3~4학년쯤 되었을 것이다. 사촌 형은 나보다 11살이나 많았다. 그리고 성질도 거칠고 힘세서 난 반항할 수 없었다. 누나와 동생들은 겁이 나서 잽싸게 도망가고, 나만 그 자리에 앉아서 시키는 대로 가방을 열고, 필통이며 책이며 공책이며 가방 안에 있는 걸 모두 꺼내 방바닥에 펼쳐놓았다. 이것저것 살피던 사촌 형이 필통을 들고 열어보더니 필통에 연필이 한 자루밖에 없다고 소리 지르며 화를 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서울 학교에서 시골 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나와 누나 그리고 동생들을 외갓집으로 데려다 놓고 작은어머니를 얻어 따로 살림을 차리고 집을 나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한없이 미웠지만 어려서 어찌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울고불고 난리 치셨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힘에 눌려 두들겨 맞기만 하셨다. 그걸 보면서 우리도 덩달아서 울고불고했지만, 불가항력이랄까 그때부터 외갓집에 눌러앉았다.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않으셨고 우리 식구들은 사촌 형의 폭력과 횡포에 저항 한번 못하고 매 맞으며 살 수밖에 없었다. 사촌 형은 술을 많이 마셨다. 취하면 트집을 잡아서 때리는 게 일이었다. 왜 그리 동생들을 괴롭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난 매 맞는 게 너무 싫었다. 사촌 형 그 자체가 싫었다. 정말 싫었다. 증오했다. 죽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난 어리고 힘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사촌 형이 상당히 많이 취해서 도끼를 들고 장작 패듯 마루 기둥을 내리찍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놀라서 말렸지만 이미 기둥의 절반이 심하게 패어서 도끼 자국이 선명하고 기둥은 부러질 듯 위태위태했다. 그렇게 난리를 치고 나서는 힘이 들었는지 쓰러져 잠이 들었다. 사촌 형은 습관적으로 취하면 대문 밖에서부터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지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누나와 나 그리고 남동생 막내 여동생 이렇게 넷이 취해서 들어오는 사촌 형을 피해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서 숨었다. 사촌 형이 집에 와보니 혼내줄 동생들이 없었다. 아무리 우리를 찾아도 못 찾았다. 우리는 마루 밑에서 숨죽이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한참을 찾아도 못 찾으니까, 애들 어디 갔냐고 듣지 못하는 어머니한테 소리를 지르면서 찾아오라고 난리 치며, 어머니 머리채를 잡고 때리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놈이었다. 어찌 자기 이모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릴 수 있는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맞으면서도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셨다. 혹시 애들 숨은 곳을 사촌 형이 알까 봐 맞으면서 사촌 형을 끌어다 재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마루 밑에 숨은 것을 후회했다. 눈물이 났다. 한없이 한없이 “언젠가는 나도 커서 어른이 될 거야 그땐 지금의 이 고통을 이 아픔을 그대로 돌려줄 거야” 속으로 울부짖었다.


2) 밥상


가방을 열고 가방에 든 것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처분만 기다리는 어린 내 심정은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다. 결국 필통 속에 연필이 한 자루밖에 없다고 트집을 잡고 봉당 밑 툇마루 밑에 쌓인 장작더미에서 큼직한 참나무 장작개비 한 개를 들고 오더니 그 장작개비로 마구 내리쳤다. 머리며 등이며 팔이며 다리며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개, 돼지도 이렇겐 안 때릴 거다” 속으로 말하며, 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참았다. 맞다 보니 아픔에 길들여졌는지 아픔보다 분노가 치밀었다. 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사촌 형 화 풀릴 때까지 맞았다. 크면 보자 언젠가는 나도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될 거다. 그때 내가 지금 당한 이 아픔을, 이 치욕을 그대로 돌려줄 거다. 이를 앙다물고 참았다. 결국 필통 속에 연필 한 자루보다 사촌 형의 분노가, 화가 내게 미친 것이다. 남들한텐 그렇게 잘해주면서 사촌 동생들에겐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사촌 형은 군대 갔고 삼 년이란 공백이 있었다. 자유로웠다. 술주정 부리는 사람 하나 없다고 집안이 평화로웠다. 아무도 소리 지르거나 때리는 사람이 없었다. 내 삶에서 가장 평화롭고 평안한 시기가 바로 사촌 형 군대 갔던 때 같다. 군대 갔다 제대하고 돌아오니 사람이 더 포악해졌다. 옆에 가기도 무서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사촌 형 취직할 때까지 한동안 또 같이 살아야만 했다. 나는 이 눈치 저 눈치 다 보면서 눈치껏 살았다. 어느 날인가 외할머니가 돼지고기를 사서 고추장 양념을 발라 재워 두셨다. 때가 마침 저녁때라 외할머니가 밥상을 차리셨다. 둥근 둘레 밥상과 옆에 화롯불을 놓고 그 위에 석쇠를 올려놓고 고기를 구우셨다. 상위엔 구운 고기와 김, 김치, 밥 등 맛있는 반찬 올라왔고, 사촌 형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사촌 형이 나와 남동생에게 같이 밥 먹자고 상으로 오라고 하였다. 나와 동생과 사촌 형 이렇게 셋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나는 눈치껏 김치나 맛이 별로인 그저 그런 반찬만 집어먹었는데 눈치 없는 동생이 그만 맛있게 화롯불에 구워진 돼지고기 한 점을 들고 먹었다. 그걸 본 사촌 형이 일갈한다 “이 새끼 맛있는 거만 처먹네” 하면서 밥 먹다 말고 고기를 씹고 있는 동생의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갈기는 것이었다. 나는 아차 하면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동생은 맞은 뺨이 아픈 건지 서러워서 그런 건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안에 든 고기를 씹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밥 먹다 말고 밥상에서 슬금슬금 물러나 왔다. 그 이후로는 같이 밥 먹자고 해도 두려워서 절대로 같이 밥을 먹지 못했다. 어쩌다 강제적으로 같이 먹게 되면 극도로 예민한 신경을 총동원해서 맛있는 반찬엔 젓가락이 절대 가지 않도록 내 손을 통제했다.



3) 발발이와 복수


어찌 보면 우리 형제자매는 같이 살았지만, 다들 외로웠다. 이유야 많지만 매일 사촌 형 눈치만 보고 사냐고 집안이 늘 썰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형이 발발이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나보단 내 밑에 남동생이 너무 좋아해서 발발이를 끼고 살았다. 학교 갔다 오면 발발이 챙기느냐고 늘 바쁘게 돌아다녔다. 동생 곁엔 발발이가 있었다 어디 밖이라도 놀러 나가면 발발이는 졸졸 동생을 따라다녔다. 동생은 발발이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발발이가 먹는 밥이며 잠자리며 늘 챙겼다. 잠자리는 동생이 항상 자기 옆에 이불속에다 만들고 같이 데리고 잤다. 학교 갔다 오면 발발이 먼저 찾고 발발이 먼저 챙겼는데, 어느 날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와서 발발이를 찾는데 아무리 불러도 찾아도 발발이가 꼬리를 흔들며 나타나질 않았다. 동생은 거의 혼이 나가서 발발이를 찾아다녔다. 그 모습을 본 외할머니가 동생에게 발발이는 사촌 형이 잡아먹으려고 개울로 끌고 갔다고 했다. "동생이 얼마나 잘 돌봤는지 처음에 왔을 때는 비쩍 마른 강아지가 이제는 제법 크고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사촌 형이 잡아먹을 마음이 생겼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외할머니 말씀을 들은 동생은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며칠을 그렇게 울기만 했다. 나는 속상했다. “동생이 그렇게 사랑하던 강아지였는데 잡아먹다니 그 새낀 사람도 아니야 정말 사람도 아니야 나쁜 새끼.”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사촌 형은 강아지를 자기 친구들하고 개울가에서 잡아먹고 얼큰하게 취해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 일이 벌어진 후로 동생은 부쩍 말수도 적어지고 우울해했다. 나는 속으로만 욕하고 속으로만 저주하는 내가 더 밉다고 생각했다.


가슴에 어린 시절이 한이 되었던 건 맞지만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새 나도 군대를 갔다 오고 서울서 직장을 다니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첫딸을 낳아 세상에서 둘도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아내하고 같이 옛집에 가게 되었다. 그 집에선 누나가 갈빗집을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딸만 둘이라서 듣지 못하는 우리 어머니에게 지금의 집과 땅을 상속해 주셨다. 사촌 형은 서울로 떠나고 그도 가정을 꾸려 딸만 셋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사촌 형은 욕심이 많았다. 외할머니가 재산을 정리할 때 사촌 형 몫으로 집 옆의 땅을 팔아주었다. 그런데 그 돈이 부족하다고 장사하는 집에 와서 장사도 못하게 문 닫게 하고 온갖 행패를 다 부렸다. 마침 내가 있을 때 그런 행패를 부렸기 망정이지 내가 없었으면 일방적으로 당했을 것이다. 사촌 형은 집안 물건을 다 때려 부수고 외할머니를 위협하고 땅 더 팔아 달라고 생떼를 부리며 온갖 패악질을 다 했다. 그 꼴을 본 난 참고 싶어도 참을 수 없었다. 마침내 쌓였던 것이 무너졌다. 곪고 곪은 상처가 터졌다. 어릴 때부터 한이 되어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사정없이 피가 솟구쳤다. 난 앞이 안 보였다.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갔다. 사촌 형은 쓰러졌다. 발로 짓밟았다. 한참을 두들겨 팼다. 주먹으로 발로 나한테 맞게 된 사촌 형은 넋이 나갔다. 설마 내가 때릴 줄 몰랐던 것이었다. 항상 자기가 지배했던 동생들이라서 이렇게 심하게 반란을 일으킬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넋 놓고 앉아서 나한테 욕만 하다가 아내가 그 앞을 지나가니까 소화기를 들어서 아내를 때리려고 던졌다. 난 너무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또 짓밟았다. 사촌 형은 앞니가 다 부러지고 얼굴에 피가 나고 거의 초주검 상태에서 동네 사람들이 와서 말리려 했으나 내가 성질을 부리고 난리를 치니까 말리지도 못하고 구경들만, 하고 있었다. 얼마만큼 때렸을까 외할머니가 나를 잡고 말렸다. 나는 마지못해 때리는 걸 멈추고 사촌 형을 바라보았다.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일이 벌어진 후로 사촌 형은 절대로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연필 한 자루에서 시작된 일이다. 지금은 연필보다 컴퓨터에 자판기로 글을 쓰다 보니 예전처럼 연필의 위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옛일을 돌이키다 보니 마음 한편으론 씁쓸한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사촌 형에게 전화가 왔다. 음주 운전으로 걸려서 벌금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벌금을 못 내면 감방에 간다고 돈 좀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난 가진 돈이 없다고 벌금 낼 돈 없으면 감방에 가시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세상을 살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인간에게 나의 어린 시절을 폭력으로 빼앗겨버렸다고 생각하니 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불쌍하기도 했다. 이제는 용서해야지, 아버지도, 사촌 형도, 내 가슴에 상처도, 내 필통 속의 연필도, 어린 시절 불행도 모두 모두, 이제부턴 스스로 나 자신에게 평안을 주는 삶을, 최선을 다하는 삶을, 거리낌 없이 연필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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