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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Jun 30. 2023

DAY8. 슬픈

Written by. DKS

1) 아픔


세상에 슬픈 일들은 참 많다. 가슴을 열고 일일이 뒤집어 보면 우리가 살아온 날 중, 슬프지 않았던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슬픔은 우리 옆에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생각하지만, 우리 가까이서 위협하고 있는 게 슬픔이다. 우린 옆구리에 보이지 않는 칼날을 대고 산다. 슬픔이란 축축한 칼날을, 그놈은 날을 바짝 세우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약해지면 바로 찌르려고 항시 노리고 있다. 그 칼날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도망치고 몸부림쳐도 결국 슬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옆구리엔 슬픔 주머니가 매달려서 한가득 눈물을 담고 우리를 끌고 다닌다. 그러다 언제 터져서 흐를지 모른다. 결국 슬픔의 늪에 빠져 발버둥 치다 더 깊숙이 들어가고 만다. 살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저 깊은 심연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만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가진 모든 게 암흑 속에서 소멸 대고 나서야 멈추는 늪, 벗어나려 애쓰지 말자. 그저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순종하자. 그러면 슬픔은 반드시 왔다가 떠날 것이다. 내 주변에 많은 사람이 세상을 등진다. 어머니, 아버지, 외할머니, 고모, 고모부, 등 동네 어르신들, 내가 기억했던 아는 많은 사람이 이젠 이 세상에 없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묏자리를 봐주시던 스님과 같이 따라오신 동네 어르신, 묏자리에서 막걸리 한잔하면서 앞산 자락을 바라보며 이쪽에 솟은 봉우리가 이러니 저쪽에 솟은 봉우리가 저러니 하면서 지관을 보시는 스님보다 아는 척을 더 많이 하시던 어르신과 그 또래의 어르신들 모두 살다 간 자국만 세상에 남긴 채 돌아가셨다. 나는 슬픔에 대해서 죽음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려 했으나 우리 옆에 죽음은 늘 있는 것이기에 누군가 죽어가는 슬픔은, 슬픔이라기보단 아픔이라 하는 게 이치에 더 맞는 것 같다.


2) 슬픔


슬픈 이란 주제에서 첫사랑 이야기를 하는 게 좀 뜬금없는 이야기라 하겠지만, 난 슬픔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단연코 첫사랑을 꼽는다. 가장 슬펐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것이 사랑이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은 건 중학교 졸업하고 1년 동안 재수할 무렵이다. 그전엔 여자도 사랑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 집 뒤꼍은 울타리가 돌담으로 빙 둘러쳐져 있었다. 앞쪽으로부터 살구나무, 대추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앵두나무, 그리고 키 큰 미루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살구나무는 돌담 건너편에 길가의 옆집에도 있었고 윗집 마당 가에도 있었다. 봄날, 살구꽃이 활짝 펴서 사방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은근히 부는 바람에 연약한 꽃잎이 흔들려 허공으로 흩어져 높이 솟았다 휘돌아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 골골이 저미는 아름다움과 형언할 수 없는 잔잔한 슬픔에 몸을 떨었다. 그 무렵, 나에겐 활짝 핀 살구꽃처럼 분홍빛 사춘기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선 늦게 찾아온 사춘기였다. 처음으로 눈뜬 사랑, 난 외로웠다. 몹시 외로웠다. 아무에게나 다가가서 절실하게, 간절하게 내 마음을 열어젖히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낄 때였다. 우리 집 돌담 위엔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이 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던 소녀는 바로 돌담 건너편에 사는 윗집 소녀였다. 그녀는 나보단 한 살 위였고,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난 재수하고 있었기에 간간이 집안일을 돕거나 주로 노동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참 많지만, 그땐 노동이 거의 전부였다. 하루 임금이 지금 돈 2,500원 하던 때이다. 내가 재수하게 된 동기는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 3학년 때 한 학기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졸업장 없이 고등학교 진학 시험을 보기 어려웠다. 재수하는 일 년 동안 여름내 집을 오가며 산속에 기도원을 짓는 곳에서 진학 못 한 친구들과 같이 노동일을 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벌어서 내 졸업장도 찾고 누나 졸업장도 찾아 주었다.


나는 찾아온 사춘기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반항심도 강해졌고 그동안 여자로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여자로 보였다. 가끔 그녀가 교복을 입고 등하교 모습을 보게 되면, 가슴이 뛰고 예뻐 보였다. 동네가 작아서 그런지 1년 선배들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잘 지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았고, 그녀가 선배라도 이름을 부르며 장난칠 정도로 가까웠고 친했다. 그냥 소꿉친구 같은 사이였다. 가끔 우리 또래의 친구들과 1년 선배들과 같이 모여서 밤새워 놀기도 하고, 이야기하면서 날새기도 했다. 자주 부딪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처럼 지내던 그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 누군가 옆에서 요술 방망이를 들고 요술을 부리는지 그녀만 보면 얼굴이 화끈대고 가슴이 뛰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녀와 어릴 때 소꿉장난하던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느낀 야릇하고 이상한 감정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다. 그녀를 하루라도 못 보면 안절부절못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녀를 보아야 뛰던 심장이 안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그녀가 학교 가는 모습을 보려고 마루 뒷문을 빼꼼히 열어 놓고 그녀가 돌담길 위로 지나가길 기다리며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학교 가는 시간이면 매번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러다 운 좋은 날이면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과 같이 길(새로운 도로가 나면서 이젠 폐 도로가 된 길) 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밤을 꼬빡 새기도 했다. 그땐 동네 주변에 가로등도 없었다. 전기는 들어왔지만 집집이 아껴 쓰냐고 전깃불을 잘 안 켜서 그런지 하늘엔 별이 참 많았고 밝았다. 유난히, 흐르는 은하수의 모습이 보기에 아름다웠다. 말 그대로 하늘은 별천지였다. 그렇게 그녀와 자주 만나서 대화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변했고, 그제야 감정의 소용돌이 중심에 내가 휘말려 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 서서히 움직이며 다가오는 감정, 그걸 사랑이라 하겠지만 일방적인 내 감정일 뿐 그녀의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나 혼자만의 일방통행이었다. 그런 감정을 느껴본 사람은 알겠지만, 얼마나 애타고 아린지, 좋아해, 사랑해, 이런 낯간지러운 말들만 속에 가득 채워놓고, 보내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그러던 어느 날은 그녀가 몹시 보고 싶어서 집 뒤꼍에 키 큰 미루나무 꼭대기 이파리가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에 널빤지를 끌어올려 걸쳐놓고 앉아서 그녀가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기다리곤 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했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그녀의 모습이라도 보겠다는 집념 하나로 그러한 행동을 하였다. 결국 미루나무는 껍질이 닳아서 반들반들해졌다. 그렇게 여름은 별다른 이유 없이 애타게 지나가고, 가을도 그냥 무심하게 내 맘도 모른 체 휑하니 지나갔다. 날은 흘러 하얗게 눈 쌓인 겨울이 왔다. 이제는 더 이상 감정을 속이지도 참을 수도 없었고 버틸 용기도 없었다. 이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녀를 만나서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더 이상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간 내가 나에게 용서하지 못할 큰 사달이 날 것 같았다. 겨울은 얼음장 위를 미끄럼 타듯 흐르고 있었다. 시간과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하얗게 눈 쌓인 겨울, 방학을 맞은 그녀는 집에 있었다. 우연히 그녀 집 앞을 지나다 그녀를 보았다. 약간 떨렸지만, 용기 있게 다가서서 저녁에 시간 되면 만나자고 말했다. 그녀는 흔쾌히 만나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와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박동 수를 잊고 마구 뛰는 가슴을 저만치 던져놓고,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좀 유치하긴 했지만 그 말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시간이 흘러 저녁이 오는 줄도 몰랐다. 마침내 기다리던 밤이 왔다. 난 먼저 나와서 길 위에서 서성거렸다. 제법 겨울바람이 찬데 추운 줄도 몰랐다. 멀리서 희미하게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 저쪽 앞산 밤나무 밑 사람 없는 은밀한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말없이 따라왔다. 거긴 제법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였다. 도착하자마자 자리를 잡고서 난 그녀를 바라보며 용기 내어 말했다. “난 오래전부터 널 많이 좋아했어, 네 감정을 잘 몰라서 이제야 널 좋아한다고 고백해, 네 마음은 어때? 싫으면 싫다고 말해줘 지금이라도 네 맘을 알고 내 감정을 정리하고 싶어” 난 심각하게 말했다. 내 말을 차분하게 들은 그녀가 나를 한참 바라보며 생각하다 말했다. “나도 널 많이 좋아해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먼저 말할 수 없잖아, 그래서 네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렸는데, 이제야 말하네" 하얀 눈 위에 밤나무 밑에서 주고받은 대화는 황당할 정도로 너무 간단했다. 그렇게 간단한 대화를, 고백을, 말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오랜 시간 내가 나를 속으로 때리고 욕하며 용기 없는 놈이라고 자책했는데 그 한마디가 나를 이렇게도 행복하게 만들어 줄지 정말 몰랐다. 좋아해, 낯간지러운 그 말 한마디가,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기 위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근두운에 올라탄 기분이랄까’ 난 정말 구름 위에 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보이는 모든 게 푸근하게 느껴졌고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뜨거워졌다. 이게 사랑이란 거구나 혼자만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구나, 내가 널 알고 네가 날 알아줬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구나. 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얻었으니 내 무엇을 더 바라리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그해 겨울은 지나가고 나도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해서 1학년으로 입학했다. 그녀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녀서 고등학교 3학년이면 현장 실습을 나가야 했다. 이듬해 봄 그녀는 개인택시 회사 경리로 실습을 나갔다. 서울 근교에 자취방을 얻어놓고 직장을 다녔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주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난 학교에 가서도 집에 와서도 오로지 그녀를 만날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만 기다렸다. 토요일 저녁이면 그녀는 퇴근하고 그녀의 집으로 왔다. 미리 약속해 둔 장소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먼저 가서 기다렸다. 개울 건너 강가에 우리 둘만의 아지트가 있었다. 장마로 개울물이 불어나면 개울가에서 기다리다 그녀를 업고 건너기도 했고, 물안개 피는 강가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함께 빌어 보기도 했다. 난 수없이 많은 말을 했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말 많은 사람인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렇게 사랑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학교에 다니다 보니 다른 여학생에게 고백도 받아보고, 친구 여동생에게 좋아한다고 만나자고 하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내겐 오로지 그녀만 있었다. 모든 유혹을 다 물리치고 오로지 그녀만을 사랑하고 좋아했다. 세월이 등허리에 기름을 발랐는지 재빠르게 미끄러지는 것이 정말 야속하기만 했다. 벌써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난감했다. 난 고등학생이고 그녀는 사회인이 되었으니 만날 기회도 줄어들고 그녀는 그녀대로 바빴다. 난 주말이면 목 빼고 앉아서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둘 사이가 멀어졌다. 난 변함없이 한결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만남이 줄고 자주 그녀가 집에 오지 않다 보니 주말이면, 그녀 집 근처를 서성거리거나, 버스에서 그녀가 내려주길 고대했다. 애타는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러다 그녀를 못 본 지 오랜만에 그녀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았고 목숨까지 내줄 수 있는 사랑인데, 쉽게 끝나길 바라진 않았다. 미련이 많이 남았다. 그러나 내 뜻과 상관없이 그땐 이미 많이 늦었다. 그녀가 임신 초기란 사실을 난 뒤늦게 알았다. 상대는 그녀가 자취하던 주인집 총각인데 군대 제대하고 와서 그녀와 사귀었다고 한다. 이제야 그녀가 날 만나 주지 않은 이유를 알고 납득이 되었다. 그런 사연을 알게 된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 행복하게 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하면서 난 미친놈 같았다. 생각과 말이 엇나갔다. 정말 내가 원하던 이별인가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지난날은 달콤하기도 했고, 개울가에, 강가에, 수없이 많이 새겨놓은 추억들 사랑이란 단어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내 모습을, 난 정말 못난 놈이었다. 왜냐하면 난 능력이 없었다. 용기도 없었다. 그녀를 둘러업고 날라 버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단지 고등학생이란 이유로, 그녀와 같이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좌절했다. 겉으론 근사한 말을 하며 잘살라고 이별했지만, 속으론 거의 미쳐 죽을 지경이었다. 당시엔 슬픔을 이기려고 술을 많이 마셨다.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아마도 그때가 가장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았다. 그러나 술로 슬픔을 달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별의 후유증과 정신적 받은 타격으로 많은 날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마침내 담임선생이 찾아왔다. 출석일 모자라서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한다고 휴학을 권유했다. 나는 마지못해 휴학했다. 실은 학교든 뭐든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홀로 떠나고 싶었다. 가출을 꿈꿨다. 역시 생각뿐 부족한 용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휴학하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날마다 강에서 살았다 주로 낚시와 술로 시간을 보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강 중심에 배를 띄우고 흘러가는 물살을 바라보며, 마치 영상처럼 물 위에 지나간 추억을 비춰보고 또 비춰보았다. 눈물이 강이 되어 흘렀다. 나 홀로 강 중심에 배를 띄우고 맘껏 울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흐르는 강물에 그동안 있었던 내 모든 것을 다 흘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다 그냥 풍덩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충동을 참았다. 차분하게 생각했다. 내 삶도 삶이니까 악착같아야 한다고, 그렇게 용기를 내어서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시 다잡고 학교로 돌아왔다. 미뤄뒀던 공부를 다시 시작해서 고등학교 3학년을 마저 마치고 사연많은 졸업했다. 졸업하던 봄, 입대 영장이 날라 왔다. 입대 시기는 8월 13일,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체검사를 미리 받아 둔 상태라 언제든지 군대에 갈 수 있었다. 당시 신체검사 등급이 갑종 1급으로 판정받아 현역으로 징집 대기 상태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너무 힘들었다. 세상이 다 어둡게 보였다. 오로지 그녀만 생각났다. 역시 강가에서 술과 낚시로 시름을 잊고자 시간을 보냈다. 내가 배를 끌고 강으로 나가면, 동네 선후배들이 소주를 사다 놓고 강가에서 기다렸다. 낚시를 끝내고 어둑해질 무렵 강에서 나오면 잡은 물고기로 회를 떠서 같이 술을 마셨다. 민물회는 정말 맛있었다. 나는 술을 맘껏 거침없이 많이 후련하게 마셨다. 미쳐 날뛰는 감정을, 그녀를 잊기 위해 노력했고, 기억을 벅벅 문대며 남아있는 흔적마저도 지워 버리려 애썼다. 하지만 끝없는 슬픔이 가슴속을 후벼팠다.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그렇게 아프고 아렸다, 그러다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녀는 이미 결혼해서 딸을 낳았다고 한다. 난 군대 갈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군대 가기 며칠 전 그녀가 찾아왔다. 뜻밖이었다. 우리 집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마루에 앉았다. 나는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떨려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는 나에게 군대 잘 갔다 오라고 따듯하게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난 속으로 흐느꼈다. 그리곤 능력이 없어서 뺏긴 사랑이라고 나를 탓하고 저주했다. 절대로 그녀를 원망하진 않았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었다면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렇게 허무하게, 그녀를 보내진 않았을 텐데 하다못해 그녀에게 매달려 볼 수도 있었는데 더러운 자존심, 후회는 행동을 앞서지만, 이미 벌어진 일, 주워 담을 수 없는 일, 허무하게도 진한 홍역을 앓고 난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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