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D Jun 23. 2023

DAY8. 슬픈 <그리고, 그리고.>

Written by. ED

DAY8. 슬픈 <그리고,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생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호흡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에 서있었다. 구름이 아주 많이 끼어있는 흐린 날씨였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모아둔 돈은 떨어진 지 오래였고, 병원비는 두 달째 밀려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잣말하는 것도 습관이 될 정도였다. 예상하건대,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비가 내릴 것이고, 아마도 병원에서 짐을 정리해서 나가라고 할 것이다. 사람이 사경을 헤매든 헤매지 않든 그들에게 중요한 건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실재하는 재화뿐이다. 오로지 재화만이 믿음을 주고 안식을 줄 뿐이다. 우리에게 줄 평안은 없다. 무엇을 기대하는 가, 무엇을 바라는가. 눈앞에 닥쳐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인식할 힘만 간신히 남아있을 뿐이다. 어느 날은, 정신이 돌아와서 좋아하는 일들이 뭐냐고 물었다. 생전 물어보지도 않던 생소한 질문이었다. 왠지 모르게 성실하게 대답해야 할 의무처럼 느껴져 게걸스럽게 대답했더니, 들은 척도 안 하고 성하지도 않은 몸을 절룩거리며 병실을 떠났다. 화장실도 혼자 가기 힘든 사람이 정신이 돌아와서 하는 일이라곤, 그렇지라고 혀를 끌끌 차며 따라갔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시간에 맞춰 기계처럼 움직이는 간호사들, 죽은 듯이 자고 있는 환자들, 온갖 체액과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병실을 나와 일기를 썼다. 내가 좋아하는 일, 좋아했던 일들. 되는대로 지껄이는 게 아니라 적어보고 싶어졌다. 학생들이 다니지 않는 도서실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학교에서도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매일 어떤 책을 읽을지 정해두고 읽었다. 그 정도로 좋아했던 독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선 공장에 바로 취직하는 바람에 시간을 짜내 간신히 읽던 책도 어느 순간 읽지 않게 되었다.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하는 고된 노동에 의지가 꺾이고 눈동자는 흐릿해졌다.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를 떠미는 동안 그녀의 정신은 파괴되고 있었다. 애초에 받은 사랑이 없으니 줄 사랑도 없었다. 사회적인 시선도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았으며 결국 우리는 아무 연고도 없는 친척집으로 가게 되었으나 처지가 좋지 않아 매일 눈치를 봐야 했다. 태어날 때부터 대접받지 못한 존재들은 어딜 가나 대접받으려면 남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했다. 처지가 나아지려면 무엇이라도 붙들어야 하지만, 우리가 붙들 것은 허공뿐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미약한 정신과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나보다 먼저 부서졌다. 처음엔 하루, 그다음엔 이틀, 그다음엔 사흘, 계속 늘어났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이야기를 하고,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잤다. 내가 말을 걸면 어떤 날은 대답해 주고, 어떤 날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점점 나빠지는 그녀를 보고 결심했다. 그녀를 데리고 나와야만 했다. 노인 둘이서 살기도 빠듯했을 텐데 형편에 맞게 최선을 다해주었고 묵묵히 돌봐주었다. 굶기지 않았고 옷이나 학용품도 자주 사주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시장에서 사 온 저렴한 물건이나 바자회에서 건져온 비교적 새것처럼 보이는 물품들을 사다 주었다. 차갑고 눅눅한 밥, 시어 빠진 김치, 시래깃국, 어디서 먹다 남겨온 치킨들, 경로당에서 쥐어주는 소소한 간식들도 다 우리에게 내주었다. 언제나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온기가 가득한 손으로 머리만 쓰다듬어주었다. 그럴 때 가끔 눈빛이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그녀는 다시 혼잣말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하고 2년쯤 지났을 때 방을 구할 돈을 제외하고 저금한 돈을 모두 드리고 떠났다. 연락처 하나 없이 떠난 후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 집을 떠나 온 지 어느새 스무 해가 넘었다. 처음 취직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또 다른 공장으로 계속 옮겼지만 손에 쥐는 돈의 액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얼 더 해볼 여력이 나지 않았다. 노인들이 종종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때의 눈빛도 보이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 년 전부턴 혼자 거품을 물고 기절하기 시작해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병원비 댈 형편도 마땅하지 않아 입원하고 퇴원하길 수차례였다. 병원을 옮기는 일도 이력이 났다. 이 근방에서 갈 수 있는 마지막 병원이었고, 그녀의 마지막 병원이 될 예정이었다. 모든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러시아 문학이라는 것만 남아있었다. 러시아, 미국, 영국, 일본, 그리고 누구를 좋아했더라. 그다음에 좋아했던 일은 뭐였더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나에게 무엇이 남았더라.

매거진의 이전글 DAY 7. 연필 <광기 어린 눈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