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DKS
아름답기 위해 피어난 꽃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꽃을 바라볼 때 꼭 아름답게 바라보지만 않는다. 정말 꽃을 싫어하는 이도 있고, 꽃이 주는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꽃을 대하는 태도가 데면데면한 이도 있다. 사람들은 좋든 싫든 저마다 좋아하는 꽃 한가지 그리고 꽃에 대한 추억 한 개쯤 있으리라 생각한다. 꽃이란 종류별로 꽃말도 다르고 의미도 다르다. 나 같은 경우는 국화꽃을 좋아한다. 어떤 국화꽃이든 색깔과 모양에 상관없이 국화꽃 그 자체를 좋아한다. 요즘에(예전부터 그랬는지 몰라도) 흰색 국화꽃은 주로 장례식장 추모의 꽃으로 많이 쓰인다. 꽃말은 ‘갈망, 진실, 성실한 마음’이지만 꽃말과 다른 용도로 장례식장에 많이 쓰인다. 나는 어릴 때부터 국화꽃을 좋아했다. 엄마가 집 대문 가에 화단을 만들어 국화꽃을 심고 가꾸셨다. 늦가을이면 작은 국화꽃 송이들이 무리 지어 피었다. 가을 된서리 맞으면서 끄떡없이 폈다. 노란색, 흰색, 분홍색, 각가지 색깔의 국화꽃이 내뿜는 향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진했다. 가을 동안은 마당 주변에 국화 향기가 떠날 날이 없었다. 특히 꽃잎에 내려앉은 하얀 서리에도 시들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국화, 그 강인함과 진한 향기에 반해서 나는 국화꽃을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런 국화꽃에선 엄마의 향기가 난다.
그러나 국화꽃보다 더 아름답게 내 마음속에 들어앉은 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내 딸이다.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내 딸은 생일이 음력 1월 1일, 양력 1월 27일이다. 당시 만삭인 아내를 두고 구정 쇠러 시골집으로 가려고 했으나 아내만 두고 갈 수 없어서 망설였는데 아내가 말하길 “아직 예정일이 보름이나 남았어요, 다녀오세요”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난 조금 망설였지만, 아내가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해서 마지못해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시골집엔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계셔서 서울서 직장을 다니지만, 명절 때면 시골집에 와서 2~3일씩 머물다 가곤 했다. 당시는 핸드폰이 없었고 집에 전화가 한 대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선후배를 만나서 윗동네 선배네 집으로 놀러 갔다. 낮부터 모여 술 한잔하다가 어쩌다 보니 고스톱판이 벌어졌다. 나는 얼큰한 술기운에 고스톱판에 끼어들게 되었다. 돈을 잃고 따고를 떠나서 오랜만에 친구들과 동네 선후배들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2년 선배가 본인 이야기를 했다. 선배는 요즘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결혼해서 딸아이도 낳고 직장을 다니며 아끼고 아껴서 인천에 좋은 집을 마련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은근히 선배가 부러웠다. 당시 난 집은커녕 서울에서 월세로 살았다. 첫 살림은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싸구려 월세방에서 시작했으니 그 선배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구정 전날 동네 장정들이 선배네 집에 거의 다 모였다. 남자들 목청이 굵어서 그런지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시끄러웠다. 고스톱판이 한창 무르익었다. 술 마시며, 고스톱 치며, 떠들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다가왔다. 시간을 재던 친구들이니 차례 지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제사를 안 모시지만,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왔다. 새벽녘 집에 와보니 외할머니는 주무시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깨셨나 보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얘, 방금 네 서울 장모한테서 전화 왔었다.” 나는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할머니는 대답하셨다. “글쎄다 너 없다고 하니까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면서 끊었어, 그래서 나도 무슨 일인지 몰라” 나는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한다고 하셨는데 기다리는 게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서울 집에 전화했지만,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점점 걱정이 더 크게 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가, 예정일이 보름이나 남았다고 했는데, 혹시 병원에 갔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장모의 전화를 기다렸다. 초조하게 시간은 흘렀다. 전화를 기다리다 지쳐갔다. 시간이 제법 흘러 아침 먹을 때가 되어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마침 배도 고프고 해서 할머니가 끓여주신 떡국을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있었는데, 마침내 따르릉따르릉, 기다리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냉큼 전화기 옆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장모님 목소리였다. 장모님 첫마디가 “자네 미안하네, 딸 낳았네.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쉬다가 올라오게” 하시면서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순간, 딸을 낳기 위해 고생했을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불렀다. 당시 조그마한 우리 동네는 택시가 없었다. 면 단위나 읍 단위에만 택시가 있었다. 급히 전화로 부른 택시는 지방 택시라서 서울로 가려면 요금이 두 배였다. 나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바로 택시에 올라타서 서울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가 임신해서 쭉 다니던 병원이기에 어느 병원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내 급한 사정을 운전기사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기사님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한 두어 시간 빠른 속도로 내 달리셨다. 드디어 택시는 병원에 도착했다. 난 택시에서 내려서 병원 안내실에 아내가 어느 병실에 있는지 확인하고 곧바로 병실로 갔다. 고생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첫애인데, 낳는 순간 내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 순간 난 고스톱을 치고 있었으니 정말 몸 둘 바를 몰랐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만 밀려왔다. 그러는 내 모습을 본 아내는 오히려 나를 이해해 주고 딸이 있는 병실로 나를 데려갔다. 간호사가 딸아이를 안고 병실 유리창 너머로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순간, 딸을 보자마자 강한 희열에 온몸이 떨려 왔다. 처음으로 마주한 내 딸은 천사였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보는 순간 나의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딸아이 그 자체가 내 목숨과 진배없었다. 나는 한없이 기뻤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속으로 기도드렸다. 이제는 가족이 하나 더 생겼으니 내 딸을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하게 해줘야지 하는 마음밖에 없었다. 지금도 돌이켜 생각하지만 “딸이라서 미안하네” 하셨던 장모님의 말씀이 뇌리를 울린다. 나의 소중한 딸, 누가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꽃이 어떤 꽃이냐고 묻는다면, 난 조금의 망설임 없이 내 딸이라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