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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Oct 26. 2023

DAY. 11 달

Written by. dks

내가, 내 집 베란다를 통해서 둥근 보름달을 볼 수 있다는 일은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던 일이다. 이렇게 꿈꾸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24평 18층으로 이사 온 후로 볼 수 있는 신기한 현상이다. 말 그대로 환상이다. 이사 오기 전까진 월세방과 전세방, 반지하를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왔다. 무슨 돈이 많아서 아파트를 사서 온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박근혜 대통령 때 디딤돌대출이란 대출상품이 나와서 나 같은 사람도 접근하기 쉬워졌다. 그래서 어려운 결정을 하고 현재의 집을 사서 이사 왔다. 참 좋은 일이 벌어진 건 맞는데, 그놈의 대출 갚아 나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아내와 결혼하고 처음으로 얻은 집은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은 낙후된 월세방이었다. 방 한 칸에 부엌이 있는 집이었다. 당시는 거의 모든 집들이 연탄을 때던 때였다. 출근하고 나면, 운전을 직업으로 하던 큰처남이 동생 불쌍하다고 시간 날 때마다 와서 양동이로 가득 물을 길어다 주곤 했다. 첫애를 그 집에서 가졌고 아내가 배부른 상태에서 조금 나은 환경으로 옮기려고 길 건너 뚝방 가에 있는 집으로 전전세를 주고 이사했다. 그 집에서 첫딸을 낳고, 다니던 회사 자재과 일에 지친 나는 장사를 해보겠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대성리 본가로 내려왔다. 갈빗집 한다고 누나와 매형이 대성리에 내려와 일을 시작했고, 열심히 도와서 부지런히 집 개조를 했다. 주방이며, 홀이며 제법 갈빗집 같은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내도 돌도 안 지난 딸애를 보살피며 홀에서 서빙 일을 도왔다. 안 그래도 발목이 아파서 만성 골수염이란 진단을 받은 상태여서 조금만 움직이면 붓고 아파서 서빙을 오래 못하고 발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아픈 아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내와 딸을 서울 처가로 먼저 올려보냈다. 그리곤 당분간 나만 서울과 대성리를 오가곤 했다. 아내와 딸을 서울에 두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웬만큼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정신과 몸이 지칠 대로 지쳐서 최후의 수단으로 대성리 갈빗집을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 늘 그렇듯이 월세방을 얻었다. 사실 대성리로 내려갈 때 그나마 전전세로 계약했던 돈은 대성리로 가면서 할머니에게 드려서, 막상 서울로 오니 월세방 얻을 돈도 없었다. 몇 푼 안 되는 계약금을 겨우 구해서 월세방을 얻었다. 사실 우리는 대성리에서 자리 잡고 올라올 생각을 안 했었다. 그렇지만 아내는 아프고 치료도 해야 하고 딸아이도 보살펴야 해서 나는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대성리에 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무일푼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와서 전 직장 동료들에게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동료의 소개로 LG전자의 TV 리모컨을 만드는 회사의 자재과 대리로 입사했다. 입사하고 나서 집은 신길동, 회사는 부천, 새벽에 일어나 마을버스로 신도림역까지 그리고 전철로 부천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회사까지 가는 시간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힘든 출퇴근의 편의를 위하여 결국 부천으로 이사를 왔다. 역시 월세로서 봉급은 적지만 아내와 딸과 아들과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결과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두려운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부천으로 이사하고 나서 두 번이나 좀도둑이 집에 들어와 생활비라고 그나마 감춰둔 돈 다 털리니 불안하고 겁이 나서 도저히,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었다. 또한 아내와 딸과 아들의 생명을 담보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좀 힘들더라도 다시 서울로 이사할 결심을 하고, 신길 5동 단칸방에 역시 월세로 이사했다. 이 집은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이런저런 좋지 못한 일로 가득 찬 집이었다. 한번은 세 살 정도 된 아들이 화장실로 가서 그만 실수로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우는 소리가 들려서 뛰쳐 나가보니 아들이 화장실에 갇혀서 나오질 못하고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나는 그만 화장실 창문을 깨고 손을 뻗어 문고리를 풀고 아들을 데리고 나온 적 있다. 당시 서민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다. 앞집이나 옆집이나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도토리 키 재듯이 그냥저냥 어울려 살았다. 그리던 와중에 아들놈이 또 한 번 사건을 저질렀다. 소변이 너무 급한 아들놈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눈앞 텔레비전에다 냅다 오줌을 갈겨버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연기가 솟더니 전원이 나가 버렸다. 나는 급히 아들놈 먼저 안고 피했다. 전원 코드를 빼고 곧바로 A/S를 신청해서 수리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화장실 딸린 집으로 이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윗동네 신길 5동, 주인이 철물 집 하는 집에 화장실 딸린 단칸방에 월세 계약하고 이사했다. 처음으로 방안에 화장실이 있는 집이었다. 밖으로 나갈 일 없고 요강을 들여놓을 일 없어서 참 좋아했다. 애들이 더 좋아했다.



내가 회사에서 자재 일을 하다 보니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 참 많았다. 부천 직장도 공장이 삼 층이라서 전자 회로 기판이나 무거운 자재들은 등짐으로 메고 날라야 하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인가, 전자 회로 기판을 등에 지고 삼 층 자재과로 옮기다가 무릎에 무리가 왔다. 걷기도 힘들 정도로 무릎이 아파서 첨엔 좀 지나면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점점 더 무릎이 아팠다. 할 수 없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니 무릎 측면에 반월상 연골이 찢어졌다고 수술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나는 휴가를 내고 수술받았다. 그러나 그 상태로 힘든 자재과 일을 더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직장도 그만두고 다시 대성리로 내려가서 갈빗집 하는 일을 도왔다. 누나가 주는 봉급은 정말 작았다. 그래도 불만 없이 다녔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곳으로 가게를, 차리고 나갔고 내 밑에 동생이 맡아서 했다. 당분간 대성리 가게를 도와가며 일을 했지만, 받는 돈이 적어서 그런지 생활비가, 아주 부족했다. 도저히 생활을 연명할 수 없어서 이번엔 다시 직장 다니기로 결심하고 철도 관련 부품 공급 업체를 하는 5촌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그 직장에 취직했다. 처음엔 경기도 안성 일죽 공장에서 일을 했고 주말마다 서울로 오는 주말부부 생활을 1년여 했다. 내가 집에 왔다가 일죽 공장으로 가는 날이면 딸아이가 서럽게 울었다. 아빠 보고 싶다고 가지 말라고, 그렇게 일한 지, 일 년이 지나 영업직으로 발령받아 다시 서울서 근무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또다시 이사했다. 이사할 때마다 매번 처남들이 와서 도와주곤 했는데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이번에 이사한 집은 방이 두 칸 화장실도 실내에 있었다. 아마도 내가 서울살이, 하면서 가장 넓은 집으로 이사 온 것 같다. 첫딸은 초등학교 다니고 둘째는 유치원을 다니고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다 싶었는데, 우환이 겹쳤다. 어머니는 자궁암으로 수술받다가 자궁암 4기라서 수술받지 못하고 수술 부위를 바로 닫아버렸다. 그 와중에 아내는 골수염이 재발하여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병원에 입원했다. 결국 아내는 만성 골수염 수술받았고, 어머니는 아내가 입원한 병원 위층에 입원해 계셨다. 수술비도 없어서 그나마 반전세로 얻은 보증금을 빼고 월세를 올려주기로 하고 그 돈으로 아내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시켰다. 위층 어머니는 누나와 여동생생이 돌봤고, 아내는 한 달간 입원 치료를 받았는데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병원에서 출퇴근하면서 보살폈다. 장모님은 집에서 애들을 보살폈다. 나에겐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덕분에 술도 많이 마셨다.



아내가 퇴원하고 집에서 통원 치료받던 때였다. 밖에선 소낙비가 무지막지하게 내렸다. 9월인데도 태풍의 영향인지 장마 때 보다 더 비가 많이 내렸다. 아내는 수술을 마치고 다리에 신기술이라고 하는 쇠막대를 여러 개 박고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현관문으로 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처음엔 뭐지 했는데 문 열고 나가 보니 주변 하수도가 역류해서 반지하인 우리 집으로 물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다가 우선 아내 수술한 다리가 젖으면 안 돼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가양동 처남댁으로 피난 갔다. 처남은 당시 아파트에 살았다. 염치 불고하고 며칠 신세를 졌다. 비가 그치고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화장실도 역류해서 집안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대충 정리하고 애들과 아내를 데려왔다. 곧바로 그 집 계약을 취소하고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이사한 집에서 여름을 보내고 겨울도 보냈다. 봄이 막 들어서는 때, 집주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때는 삼월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때 마침 보일러가 고장 났다. 주인이 보일러 기술자라고 하던데, 나는 주인에게 보일러를 고쳐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주인아줌마 하는 말이 주인아저씨가 없어서 1주일만 기다려달라고 한다. 나는 너무 화가 났다. 다른 기술자 불러서 수리해주면 되지 앞으로 1주일 동안 애들과 아내는 추위 속에서 떨고 지내란 말인가, 나는 화가 나서 항의했다. 그러나 씨가 먹히질 않았다. 난 너무 주체할 수 없어서 빈속에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주인이 살고 있는 위층으로 쫓아 올라갔다. 취기에 용기를 얻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악쓰면서 방 빼달라고 난리를 쳤다. 내가 얼마나 난리 쳤는지 주변에 구경나온 동네 사람들도 나를 보면 피하기 바빴다. 결국 그 난리를 치고 누나네 집으로 이사했다. 누나네 집이라고 별로 난 것도 아니다. 반지하에 방은 세 개지만 거실은 복도처럼 길쭉했다. 쓸모없는 집이었다. 난 전세 대출받아서 누나네 집을 전세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집도 비만 오면 건넛방에 물이 차서 양동이와 바가지로 물 퍼내기 일쑤였다. 그때부터 비만 오면 신경이 곤두서는 노이로제가 걸린 것 같았다. 어두운 반지하에 주방 천장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도저히 사람 살기 힘든 환경이었다. 재개발된다고 누나는 집을 팔고 나갔고 새로운 주인은 공무원인데 당최 집수리를 안 해주었다. 곧 재개발된다고 기다리고 전화해도 감감무소식, 저는 집만 사놓고 들어와 살지는 않고, 전화질만 해대고, 따지고 보면 불법이다. 아무튼 그런 집에서 새 주인과 티격태격하면서 십여 년을 살았다. 결국 천재일우의 기회가 와서 아파트를 사서 나왔다. 장마 때나, 소나기 퍼붓는 날이면, 지긋지긋하게 양동이와 바가지를 동원해서 물을 퍼내야 했던 그런 물과 인연을 끊은 것이다. 그 어두운 지하 방에서 내게 유일한 즐거움을 준 것은 라일락 꽃향기였다. 오월에 창문을 열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라일락 꽃향기가 얼마나 진했던지 그 향기에 대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잊지 못할 것 같다. 여하튼 그런 어두운 반지하 방에서 달을 보기는커녕 낮에 햇빛조차 들지 않는 암울한 곳에서 탈출한 것 만해도 내겐 황홀한 일이다. 지금 이사한 아파트 18층에서, 보름이면 거실 창문으로 만삭의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하지만, 삶이란 여전히 진행되는 것이라서 좋고, 나쁜,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반지하에서 탈출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박봉에 시달리며 집 대출금 갚는 일은 힘든 일이다. 아무튼 반지하에서 탈출한 현재의 아파트는 동향이라서 아침이면 멀리 보이는 건물들 위로 해가 솟고, 보름이면 꽉 찬 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위안 삼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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