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토시마) 2. 멈추지 못해 도착한 곳

일본 후쿠오카 렌터카 여행

by 남해바다

호텔에서 짐을 풀자마자 우리는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여행지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감탄이 아니라 검색이다. 짧은 일정이라 대충 동선을 짜두긴 했지만, 우리는 늘 계획보다 ‘즉흥’에 더 쉽게 설득되는 사람들이다.


도착 시간은 오후 네 시.

후쿠오카 공항에서 점심을 먹은 탓에 배는 애매하게 불러 있었고, 호텔 주변은 더 애매했다.

일정식 식당 하나, 목욕탕 하나, 편의점 하나.

그 외에는 모두 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차에 탔다. 그리고 그제야 차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빌릴 때 하는 일인데, 우리는 이미 달려본 뒤였다. 인간은 늘 결과를 체험한 후에 설명서를 읽는다.

버튼은 많고 기호는 낯설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엄숙하게 외쳤다.


“좌바우크.”

"왼쪽 와이퍼, 우측 깜빡이"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한 주문이다.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려고 계기판을 봤다.
숫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9999.


내 차에 기름을 가득 넣으면 보통 999km가 뜬다.
그래서 잠시 생각했다.


이 차는 반나절을 달렸는데
기름이 전혀 줄지 않았다는 뜻인가.

일본 자동차 산업에 대한 존경심이 급격히 상승했다.


“아빠, 9999km면 어느 정도야?”

나는 잠시 계산했다.


“부산 할머니 집이 500km니까…
열 번은 왕복할 수 있는 거리.”


아들은 감탄했고, 아내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계기판을 바라봤다.


“일본 기술이 이 정도야?”

전기차도 아닌데 기름을 거의 쓰지 않는 자동차라니.

우리는 잠시 일본에 전기차가 필요 없는 이유를 이해했다.


출발하려는데 내비게이션이 묵묵부답이었다. 고장인가 싶어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야 검색이 가능했다.


움직이는 상태에선 목적지도 찾지 못하게 하는 나라. 이쯤 되면 안전이 아니라 철학이다.


뒷좌석 안전벨트 경고등이 울려 또 한 번 멈췄다가, 다시 출발. 창밖은 양쪽으로 논. 길은 조용했고, 우리는 약간 길을 잃은 사람처럼 자유로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계기판 숫자가 9999에서 10005로 바뀌어 있었다.

달릴수록 연비가 늘어난다는 말인가.


그제야 알았다.
그건 주행가능거리가 아니라
이 차가 지금까지 달려온 총 거리라는 것을.


우리는 아무 일도 아닌 일로
한 나라의 기술력을 과대평가했다.

그러다 바다가 나왔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 가까이 가보니 이토시마 부부바위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줄 선 연인들. 우리는 줄 서는 데 약하다. 사진 없이도 기억은 남는다고 믿는다.


주차장은 한 시간 300엔.

하지만 10분이든 59분이든 300엔.

여행지의 요금 체계는 늘 단호하다. 인생처럼.

커피를 끊은 지 얼마 안 된 우리는 카페를 포기했고, 직진했다. 드라이브를 즐겼다기보다는, 돌아가는 방법을 몰랐다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러다 아무도 없는 무료 주차장을 발견했다. 세상에서 ‘무료’라는 단어만큼 인간을 안심시키는 말도 드물다. 차에서 내리니 긴장이 풀렸다.


작은 어촌 마을, 길게 이어진 해변.

걷다 보니 해변 끝이 산으로 이어졌다. 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해 질 무렵의 석양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었다.

풍경에 취해 30분쯤 걸었을까. 정상에 도착했다.

여기 오려고 온 게 아닌데, 와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들이 이곳을 ‘토토로 숲’이라 부른다는 걸. 공식 명칭은 없고, 표지판도 없다. 토토로는 없었지만, 모두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만 누군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이 동의했을 뿐이다. 세상의 많은 진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내려오는 길도 미로 같았다. 등산이라기보다는 길 찾기 놀이에 가까웠다. 산 반대편 아래에서 표지판을 보고 나서야 여기가 유명한 장소라는 걸 알았다. 평일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뜻밖의 발견은 늘 군중이 빠진 자리에서 가능하다.

이제 남은 건 저녁과 목욕.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원초적인 동기다.

아내가 찾아낸 야키니쿠 집.

호텔에서 어두운 논길을 15분쯤 걸어 도착했다. 넓은 식당에 손님은 우리뿐. 세상이 우리를 위해 예약해 둔 것 같았다.

세트 메뉴를 시키니 소, 돼지, 닭, 내장, 우설, 그리고 직접 만든 소시지까지 등장했다.

밥을 잘 먹지 않던 아들이 공깃밥 두 그릇을 비웠다.

해외에 나오면 아이들은 잠시 다른 인물이 된다.

부모도 그렇다.

맥주 두 잔에서 멈췄다.

온천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욕망은 항상 다음 일정에 의해 조절된다.

호텔에서 100미터.

지도상으로는 거의 붙어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인간은 고민한다.

‘굳이?’


호텔 안에도 대욕탕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 끝나는 일이다.
그런데 굳이, 밤공기를 가르며 외부 목욕탕으로 이동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잠시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가, 곧 비이성적인 선택을 했다.
여행에서는 늘 후자가 이긴다.

사실 이 시설이 호텔 요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검색으로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출발 전에 별점과 후기, 사진과 블로그를 두루 훑는다.

하지만 중요한 정보는 늘 검색창이 아니라

프런트 직원의 한마디에서 나온다.


“저쪽 온천도 이용 가능합니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큰 공간이 펼쳐졌다.

천장이 높았고, 탕은 네 개였다. 사우나까지 있었다.


‘일본 호텔 대욕탕은 아담하다’는 편견은

그날 물에 먼저 들어갔다.


대부분은 현지인들이었다.

관광지의 들뜸 대신, 동네 목욕탕 특유의 무심함이 있었다.

누군가는 조용히 몸을 담그고,

누군가는 익숙한 동작으로 사우나 문을 여닫았다.


여행자는 우리뿐이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켰다.

image.png 출처 : https://glocal-hotel.com/en/

밖으로 나가니 노천탕이 두 개.

난간 아래로는 논이 펼쳐지고, 그 위로는 별이 걸려 있었다.


공간이 넓어지자 시선도 멀어졌다.

물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인간이 오래전부터 하늘을 신이라 불러온 이유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여행에서 만족은 대개 기대치와 반비례한다.


이틀 동안 우리는 그곳을 찾았다.

물은 따뜻했고, 밤은 조용했고,

우리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두 시간 후, 마지막 코스는 호텔 앞 편의점.

고구마 소주 한 잔과 주전부리.

여행의 피날레는 늘 소박하다.


새벽에 인천에서 출발해 바다와 숲을 지나 고기와 온천, 그리고 소주까지.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


완벽했던 건 일정이 아니라, 일정이 무너진 방식이었다.

아마 다음 여행에서도 우리는 또 설명서를 나중에 읽을 것이다.

그 덕분에, 또 어디엔가 도착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