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오의 인연, 다이버들
다시 낭유안을 찾았다. 며칠 전 그 평온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다. 이번엔 다이버들과 배를 함께 탔다. 나는 산소통 없이, 다이버들에게 빌린 수경과 오리발만으로 바다 밑을 들여다봤다. 숨을 멈춘 채로, 생각도 멈춘 채로. 그 고요와 자유로움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커다란 관광선, 그리고 그 배에서 쏟아지듯 내려오는 수십 쌍의 한국인 신혼부부들. 코사무이에서 허니문을 보내다 낭유안으로 체험 다이빙을 하러 온 커플들이었다. 혼자인 나에게 그 풍경은 곧 불편한 현실이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들 틈에서 나는 마치 현지인처럼 낯설게 비쳐졌다. 어색한 시선들을 피하려 다이버들 옆에 붙어 ‘직원인 척’ 행동했다. 지금 생각해도 꽤 소극적이고 우스운 방식이지만, 그 순간은 어쩔 수 없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사실은 이미 지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다이버들.
레포츠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모 형, 자신의 삶을 살겠다며 대학을 휴학하고 떠나온 영걸이, 무작정 한국을 떠나 태국에서 6개월째 머물고 있는 찬우, 그리고 몇몇의 누나와 동생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됐다. 낯선 이들이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너무 즐거워서, 사진을 찍을 겨를도 없었다.
낮엔 낭유안 바다에서, 오후엔 리조트 수영장에서, 저녁엔 촛불 아래 별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야간, 해변에 작은 불판을 펴고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한국의 삼겹살과 가장 가까운 고기를 사 와 불판에 굽고, 쌈장에 찍어 먹었다. 지나가던 외국인이 궁금해해 상추에 고기를 싸서 건네자, 그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반응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건, 음식 때문이 아니라 함께 나눈 순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겹살의 맛은 분위기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진심으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대학 시절 MT 이후로 느껴본 적 없던 진짜 어울림이었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면 다른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고, “나도 그랬어.”라는 공감이 줄지어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이해하려 했고,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었다.
나는 그들 속에서 변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두려워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스스로를 숨기곤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나의 고민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었고, 그 진심이 나를 열게 했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노변 대화처럼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 조건은, 대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 폴 투니어
낭유안에서 느꼈던 ‘외로움’은 단지 감정이었다. 감정은 언제나 내 안에서 피어난다. 외롭다는 느낌도 결국은 내가 붙인 해석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서 아파했고, 그 아픔을 들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 벽을 쌓아왔다. 누군가 다가오면, 본능처럼 복어처럼 가시를 세웠다. 그렇게 나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켰지만, 결국은 나 자신에게서도 멀어지고 말았다. 고립이라는 방어 속에서, 마음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그런 나에게 따뜻한 존재감으로 그들은 조용히 다가와 주었다. 다이버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함께 있음’을 다시 배웠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은 결국, 함께일 때 더 단단해지는 존재라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나는 외로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 감정마저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오늘 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웠다. 아니, 나 자신에게 다시 다가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