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4. 나만의 시선으로

낯선 삶의 풍경 앞에서

by 남해바다

※ [하나] 3. '카오스 로드' 편은 실수로 누락되어 뒤늦게 업로드했습니다. (8편과 9편 사이) 먼저 그 이야기를 읽으시면, 전체 여행의 흐름을 더욱 자연스럽게 따라가실 수 있습니다.



19살 여름.

배낭과 10만 원 남짓한 돈만으로 집을 나섰다. 부산 사상 버스터미널에 가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버스를 끊었다. 그렇게 결정된 첫 여행지는 마산. 마산 터미널에 내려 그냥 걷기 시작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즐거웠다. 뭐가 있는지 뭐가 유명한지도 몰랐다. 떠나왔다는 자체만이 최고의 유희였다.


완벽한 여행은 무계획이어야만 한다. 코스를 정하고 예약을 하고, 일정을 잡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구속이 시작된다. 철저한 계획은 실망으로 돌아온다. 미리 계획하고 계획한 대로 여행하면, 빨리 많은 것을 볼 수 있을지언정 소소하고 소중한 것들을 놓치게 된다. 무지한 곳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 그 자체가 새로움이다.

첫 여행에서 가장 후회였던 것은 배낭의 무게였다. 입을 옷이며, 코펠, 버너, 쌀, 김치, 라면, 맥주까지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120L짜리 배낭을 꽉 채웠다. 들뜬 마음에 무게도 잊고 다니다 4일째, 가슴 밑에 물집이 생겼고, 대상포진 같은 증상과 함께 일생일대 두 번째 코피를 쏟았다. 결국 짐을 덜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한결 자유로워졌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버려야 비로소 가벼워진다는 것을.


그 어린 날의 무계획과 무소유는, 시간과 장소를 건너 지금의 여행 방식으로 이어졌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얻겠다는 마음보다, 더 적게 소유하고 더 깊이 느끼겠다는 마음.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전날 본 풍경도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이른 시간.


그때의 마산과 지금의 방콕은 너무도 다르지만, 마음만큼은 닮아 있었다. 익숙함을 떠나 낯선 길에 선다는 설렘, 그 본질은 여전했다. 나는 배낭을 짊어진 채 골목을 걷고 있다. 누군가는 효율 없는 방황이라 말하겠지만, 그 방황 속에서 나는 나를 찾아가고 있다. 무계획은 무의미가 아니다. 그 안엔 계획보다 더 솔직한 욕망과 감정이 녹아 있다. 무소유는 결핍이 아니다. 비움 속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어제보다 더 단단해졌다. 이제는 여행의 기술이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를 배워가는 중이다. 버스를 타다가도 내키는 순간이면 그냥 내리고, 아무 표지판 없는 좁은 골목에 이끌려 걷는다. 이 길 끝엔 뭐가 있을까, 그런 질문조차 없이 그냥 걷는다.


땅을 디디는 작은 충격, 발바닥을 스치는 공기의 온기, 호흡이 차오르고 빠져나가는 리듬을 느끼다 보면 ‘나’라는 존재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발걸음 끝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사소한 풍경이 펼쳐진다.


새로움은 멀리 있지 않다. 새로움은 ‘발견’의 순간에 깨어난다. 발견은 가벼운 설렘을 품고, 우리 마음을 환히 비추는 희열을 선물한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어제의 나를 벗어난다. 새로운 풍경을 본다는 건 결국, 새로운 나를 마주하는 일.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바꾸는 일이니까.

카오산 뒷골목, 어느 시장 구석. 작은 가게 앞에 앉은 노부부가 이름 모를 국수를 삶고 있었다.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눠 먹던 조용한 미소가, 내 여행의 모든 이유가 되기도 했다. 무엇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이런 삶을 ‘느끼기 위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런 감정은 그날 오후에도 이어졌다. 시장 골목을 걷다 만난 작은 포장마차. 현지인들이 어떤 생선 튀김을 즐기고 있었는데, 처음엔 낯설고 이질적이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음식에 거리를 느낀다면, 그들도 김치찌개를 낯설게 보겠지.’


그 자리에 앉아 그들의 음식을 맛봤다. 생각보다 훨씬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그제야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는 걸.

진짜 여행자는 ‘손님’이 아니라 ‘이웃’이 된다. 그들의 일상에 조심스럽게 들어서고, 그 세계를 이해하려 애쓸 때, 비로소 내 시야가 넓어진다. 그날의 튀김 한 조각은 단지 음식이 아니라, 나의 시야를 조금 넓혀주는 렌즈였다. 찰스 핸디는 <코끼리와 벼룩>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다른 문화권에서 한동안 살아본 경험은 자신의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렌즈를 마련해 준다.”


이 시장 골목에서 내가 얻은 건, 그 렌즈였다. 문화적 우위 같은 건 없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비로소 공정 여행의 문이 열린다.


나는 이제 안다. ‘편안’을 선택할 땐 보지 못했던 길들이, ‘불편’을 선택할 때 비로소 열린다는 걸. 계획된 여정이 아니라 나만의 리듬과 우회로를 따라 걸을 때, 여행은 ‘삶의 방식’이 된다. 낯선 도시의 사소한 풍경 하나가 내 시야를 흔들고, ‘삶은 꼭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나를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든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