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5. 거북이처럼 천천히

코타오로 흘러 들어가다.

by 남해바다

그 여행의 시작과 끝에는 카오산로드가 있었다. 방콕의 소음과 열기, 여행자들의 말과 몸짓이 뒤엉킨 이 거리에서 나는 여행의 방향을 정했다기보다, 흐름에 몸을 실었다. 원래 계획은 심야 열차였다. 유럽 배낭여행 때 경험했던 그 밤기차의 설렘을 다시 느끼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카오산 거리에서 우연히 들어간 한 여행사에서 버스+페리 연계표를 손에 쥐는 순간, 모든 계획은 사라졌다. 그건 더 이상 교통수단이 아니라, 예정된 무계획의 첫걸음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크’를 만났다.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청년. 그와 눈이 마주쳤고, “어디 가?”라는 짧은 질문으로 대화는 시작됐다.


코타오에 잠수하러 간다네.”

“나도 코타오 가는데… 다이빙은 안 해. 그냥…”


그 ‘그냥’에 담긴 공감이 우리를 친구로 만들었다. 낯선 언어, 낯선 얼굴. 그러나 목적지 하나만으로 우리는 서로의 거리감을 허물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맥주 세 병을 샀고, 그에게 한 병을 건넸다. 낯선 밤공기 속, 버스를 기다리며 나눈 맥주 한 병은 생각보다 더 묵직한 기억이 되었다.


밤 9시, 출발.

버스는 고요하게 방콕의 불빛을 등지고 남쪽을 향했다. 좌석은 충분히 편했고, 차 안에는 화장실도 있었다. 대형 TV에서는 오래된 미국 영화가 흘러나왔지만, 자막도 이해도 없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벽 5시, 춤폰 항에 도착.

바람이 차가웠다. 태양은 아직 수평선 너머였고, 사람들은 천막 아래서 묵묵히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누웠고, 하늘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해변 한켠에서는 어부들이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출근길의 도시와는 다른 질감의 아침. 여행자는 꿈속에, 어부는 생업에. 이 두 세계가 교차하는 그 풍경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흔들었다.

아날로그한 시스템도 신선했다. 여행사 직원이 나타나, 가슴과 배낭에 스티커를 붙여줬다. 이곳에서 갈 수 있는 섬은, 코타오, 코팡안, 코사무이. 목적지에 따라 스티커가 달랐고, 나는 주황색 테두리의 스티커를 붙였다. 스티커 하나가 곧 티켓이고, 정체성이고, 연결의 증표였다.


배는 아침 7시에 출항했다. 한국 같았으면 왜 출발 안 하냐며 투덜댔겠지만, 이곳에서는 출발을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여유였다. 바닷바람은 그리 세지 않았고, 잔잔한 물결 위 반사된 아침햇살은 마치 환영처럼 나를 감쌌다.

배 위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았다. 핸드폰 신호는 닿지 않았고, 말도 음악도 없었다. 오직 파도 소리와 낡은 엔진 소음.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강하게 느꼈다.

섬에 다가갈수록, 에메랄드빛 바다가 점점 짙어졌다. 언제든 바다로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은 리조트들이 손짓했다.

배에서 내리는 커플 백패커들이 부러웠다. 누군가와 함께 이 감정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곧 나만의 자유가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짐은 단출했다. 배낭 하나, 아쿠아백, 그리고 물통 하나. 혼자여서 아쉬운 건 내 사진을 제대로 남기기 어렵다는 것. 삼각대도 셀카봉도 없다. 결국 의자 위에 DSLR을 올려두고 힘겹게 찍은 사진. 초점은 흐릿했지만, 사진 속 나는 진짜 여행자였다. 카메라가 아니라 기억이 초점을 맞춘 순간이었다.


15시간 만에 도착한 코타오(Koh Tao).


'Koh"는 섬, "Tao'는 거북이를 뜻한다. 말 그대, 섬의 시간은 거북이처럼 천천히 흘렀다. 코타오에 발을 딛는 그 순간, 긴장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낯섦은 나른함으로 바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공간. 그것이 코타오가 주는 첫인상이었다.


‘이곳이 종착지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감정이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흘러 흘러 코타오에 도착했다. 지도 없이, 목적 없이, 다만 ‘이끌리는 대로’ 움직인 결과였다. 그 여정은 단지 거리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불안을 정화한 시간이었다. 누구의 일정도 아닌, 나만의 속도와 감정으로 써 내려간 여정. 그게 바로 여행이고, 어쩌면 진짜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