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섬엔 복잡한 사거리도, 방향을 고민하게 만드는 갈림길도 없다. 길은 단순하고, 목적지도 명확하다.
그래서일까. 섬을 좌우로 한두 번만 왕복하면, 어제 본 사람을 오늘도 다시 만난다. 거리에서 스쳐 지나며 하이파이브를 건넨 사람이, 저녁 무렵엔 해변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또 어느 날은 해변 산책로에서 잠깐 마주친 그가, 다음 날 다이빙 샵에서 강습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우연처럼 자꾸 겹친다. 그러나 이건 어쩌면, 같은 길 위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섬의 구조처럼, 이곳에서의 관계도 단순하다. 이름을 묻지 않아도, 연고를 따지지 않아도 된다. 목적은 달라도 방향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피로감이 없다. 그냥 ‘그 순간을 같이 지나간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
낯선 여행자들과의 이런 소통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늘 부담스러워하던 내게는 참으로 낯설고 따뜻한 경험이었다. 섬이 작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의 거리는 넓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사람 사이에 놓인 복잡한 골목들을 헤매 왔다. 어떤 길은 처음엔 환하게 빛나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로처럼 얽히고설켰다. 더 잘 이해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길을 잃었다. 그 미로 끝에서, 나는 종종 “이해받지 못했다”는 감정과 “내가 다가갈 수 없다”는 거리감 사이에서 방황했고, 결국엔 나만의 길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또다시 새로운 골목으로 나를 이끌었다. 누군가를 다시 이해해보려고, 나도 이해받아보려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길을 기웃거리며 걸었지만, 종착지는 대개 막다른 골목이었다. 이런 내게 코타오는 하나의 질문이자, 작은 위로였다.
"길이 하나뿐일 때,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마주하게 되는가?"
코타오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결국 그 누구도 나를 설명하라 하지 않았고, 내가 그들을 이해하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같은 리듬으로 섬을 걷는 동행일 뿐이었다.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 되듯, 이 작은 만남들은 내게 ‘함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게 했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해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워가는 존재다.”
이 말이 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코타오의 단순한 길 위에서, 나는 더 이상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굳이 애쓰지 않아도 따뜻한 거리감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복잡하게 얽힌 마음의 미로에서 잠시 벗어나, 그냥 ‘같은 길을 걷는 존재들’로 존재할 수 있었던 시간.
그건 분명, 내 안의 또 다른 섬 하나가 열리던 순간이었다. 차라리 가슴으로만 통하는, 다른 행성의 사람들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고. 적어도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시작하니까.
다시 낭유안을 찾았다. 며칠 전 그 평온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다. 이번엔 다이버들과 배를 함께 탔다. 나는 산소통 없이, 다이버들에게 빌린 수경과 오리발만으로 바다 밑을 들여다봤다. 숨을 멈춘 채로, 생각도 멈춘 채로. 그 고요와 자유로움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커다란 관광선, 그리고 그 배에서 쏟아지듯 내려오는 수십 쌍의 한국인 신혼부부들. 코사무이에서 허니문을 보내다 낭유안으로 체험 다이빙을 하러 온 커플들이었다.
혼자인 나에게 그 풍경은 곧 불편한 현실이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커플들 틈에서 나는 마치 현지인처럼 낯설게 비쳐졌다. 어색한 시선들을 피하려 다이버들 옆에 붙어 ‘직원인 척’ 행동했다. 지금 생각해도 꽤 소극적이고 우스운 방식이지만, 그 순간은 어쩔 수 없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사실은 이미 지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다이버들.
레포츠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모 형, 자신의 삶을 살겠다며 대학을 휴학하고 떠나온 영걸이, 무작정 한국을 떠나 태국에서 6개월째 머물고 있는 찬우, 그리고 몇몇의 누나와 동생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됐다. 낯선 이들이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너무 즐거워서, 사진을 찍을 겨를도 없었다.
낮엔 낭유안 바다에서, 오후엔 리조트 수영장에서, 저녁엔 촛불 아래 별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야간, 해변에 작은 불판을 펴고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한국의 삼겹살과 가장 가까운 고기를 사 와 불판에 굽고, 쌈장에 찍어 먹었다. 지나가던 외국인이 궁금해해 상추에 고기를 싸서 건네자, 그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반응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건, 음식 때문이 아니라 함께 나눈 순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겹살의 맛은 분위기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진심으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대학 시절 MT 이후로 느껴본 적 없던 진짜 어울림이었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면 다른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고, “나도 그랬어.”라는 공감이 줄지어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이해하려 했고,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었다.
나는 그들 속에서 변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두려워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스스로를 숨기곤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나의 고민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었고, 그 진심이 나를 열게 했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노변 대화처럼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 조건은, 대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 폴 투니어
낭유안에서 느꼈던 ‘외로움’은 단지 감정이었다. 감정은 언제나 내 안에서 피어난다. 외롭다는 느낌도 결국은 내가 붙인 해석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혼자서 아파했고, 그 아픔을 들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 벽을 쌓아왔다. 누군가 다가오면, 본능처럼 복어처럼 가시를 세웠다. 그렇게 나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켰지만, 결국은 나 자신에게서도 멀어지고 말았다. 고립이라는 방어 속에서, 마음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그런 나에게 따뜻한 존재감으로 그들은 조용히 다가와 주었다. 다이버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함께 있음’을 다시 배웠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은 결국, 함께일 때 더 단단해지는 존재라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나는 외로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 감정마저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오늘 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웠다. 아니, 나 자신에게 다시 다가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