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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다람쥐 Apr 29. 2023

딸아, 미안해

Day 58

초등학교 3학년 딸이 있다. 딸은 치어리딩을 하고 있다. 6살 때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4년째다. 아이들이 동네에서 흔하게 접하는 태권도나 축구처럼 취미 수준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엑스포, 전국체전 등에서 공연했었고, 미국 올랜도 디즈니랜드에서 열린 글로벌 치어리딩 대회까지 참가했었다.


어제는 경남 사천에서 공연이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 11시가 돼서야 돌아왔다. 아이 엄마와 둘째 아들, 그리고 나까지 온 가족이 도착지에서 공연하고 돌아오는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전, 치어리딩 선생님이 아이들 공연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전송해 줬다.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하는 아이가 대견하다는 생각을 한다. (공연을 하러 갈 때면, 여유시간에 그 지역 체험도 함께 한다.) 


공연 사진을 보는 중이었다. 치어리딩 단복은 배가 훤히 드러나는 탱크톱과 비슷하다. 그런데 아이 배가 유달리 불쑥 튀어나와 보였다. 아내와 내가 동시에 한 마디 한다. "얘, 배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지? 이 정도면 심각한데." 인간은 타인의 흠결에 더욱 민감한지, 아이의 다양한 경험과 멋진 모습은 잊히고 오직 배가 나왔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각인됐다. 


아이가 도착했다. 고속버스에서 내려 우리 차로 이동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아내가 아이에게 말한다. "딸, 사진 보니까 뱃살이 심각하게 나왔던데" 나도 옆에서 아내를 거들었다. "매일 초코 먹으니깐 그렇지, 초코 좀 줄여야겠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고생한 아이에게 '수고했어'나 '재미있었어?'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뱃살이 나왔다는 막말을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창피하고 아이에게 미안하다.) 아이가 말한다. 


엄마 아빠 나한테 미안해 해.
나 상처받는 말 했어.
기분 안 좋아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쉽게 생각한다. 특히 가족이 그렇다. 남들에겐 감히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할 말들을 가족에겐 대수롭지 않게 내뱉곤 한다. 만약 우리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의 뱃살을 목격했다면 "아이고, 뱃살이 통통한 게 귀엽네, 그 정도면 애교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아이에겐 그러지 않는다. 모진 말, 상처받을 말들을 거침없이 한다. 가족이니까, 나와 가까운 사람이니까 이해해 줄거란 생각에 말이다. 비단 아이에게만 그러는 건 아니다. 부모 형제 자매 아내 남편 등, 가족이라는 관계로 엮인 이들에게 우리는 가장 함부로 말하고 행동한다.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니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며 상대방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이 충고와 조언을 한다. 하지만 정말 상대방을 위해 꺼내는 이야기일까? 단연코 아니다. 그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으로 시작된 비매너 행동일 뿐이다. 타인에게는 자기중심적 생각을 마음껏 표출할 수 없다. 유일하게 내가 막말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들, 오직 가족들에게 내 이기심을 마음껏 표현한다.   


내 뱃속에서 태어났고, 의식주 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아이들을 함부로 대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다. 데일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자신의 자녀, 친구, 직원들의 신체에 영양분을 주고 있지만, 그들의 자부심에 영양분을 주는 데는 얼마나 인색한가?" 역시 카네기는 통찰력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가족에게 물리적 혹은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 충분히 자신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Jtbc〈안방판사〉에 유튜버 겸 사업가 안대장 님이 출연했다. 그는 도무지 나와 동시대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다. 아내에게 "전날 술자리를 가졌으니, 해장국이나 끓여놓고 얘기해라", "네가 나 때문에 먹고살잖아." "남편이 오면 무릎 꿇고 맞이해야지"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하지만 남편인 안대장은 당당하다. 소유한 아파트도 아내 명의로 해줬고, 크리스마스에는 900만 원짜리 귀걸이도 선물하는 등, 아내에게 충분한 물질적 보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해당 내용에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댓글을 다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놀랐다. 정말 매너 없는 남편을 만나고 싶은 걸까?) 하지만 나는 안대장 님 아내 마음이 충분히 이해된다. 매슬로우의 5단계에서 말하듯이, 물질적 보상은(안전의 욕구) 존중의 욕구 아래에 위치한다. 존중받지 못하면, 아무리 풍족하게 살아도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 〈킹스맨〉에서 갤러 허드(콜린 퍼스)는 "Manners Maketh Man"이라 말했다. 이 문장은 국내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관계에 있어 예의가 중요하다 인식되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은 유달리 나와 거리가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만 적용된 듯하다. 예의와 매너는 나와 가까운 이들, 가족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요소인데 말이다. 착각하지 말자. 존중 없는 말과 행동은 결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위한 조언이랍시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봐"라고 해선 안된다. 그건 그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일 뿐이다.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 가족끼리도 예의와 존중이 필요하다. 예의와 매너 없는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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