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좋아했다.
학창 시절 축구를 좋아했다. 꽤 괜찮은 실력이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 선생님들, 혹은 타학교와의 축구 시합이 있으면 학생, 학교를 대표해 시합을 뛰곤 했다. 군인 시절에도(경비 교도대 출신이다) 부대 대표로 대회에 출전하곤 했다.
축구는 가로 7.32m, 세로 2.44m 직사각형 모양의 하얀 기둥 안에 지름 22cm의 공을 더 많이 넣는 팀이 이기는 경기이다. 각 팀 11명, 총 22명이 지극히 단순한 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90분 이상 쉬지 않고 이쪽저쪽으로 분주히 움직인다. 머리에 피가 나도(최진철 선수의 붕대투혼), 콧뼈가 부러져도(김태영 선수의 마스크 투혼) 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자신의 몸 상태는 망각한 체, 엄청난 몰입을 보여준다. 경기를 뛰는 선수들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다. 그저 상대 팀보다 한 골이라도 더 넣기를 바랄 뿐이다. 오직 한 골이라는 목표를 향한 선수들의 열정과 몰입은 그들에게 엄청난 희열과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나 역시도 그랬다. 비가 와도, 무릎이 까져도, 발톱이 부러져도, 물집이 생겨도 상관없었다. 골을 넣기 위한 모든 과정들이 즐겁고 짜릿했다.
만약 축구라는 종목이 상대팀 골대에 골을 넣는 것이 아닌, 그저 공을 빙빙 돌리기만 하는 종목이었으면 어땠을까? 90분 내내 공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을까? 경기를 뛰는 이들에게 과연 지금과 같은 쾌감을 줄 수 있었을까? 월드컵을 세계 '3대 스포츠'라 부르는데, 공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전 세계인을 열광시킬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축구가 경기를 뛰는 선수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더 나아가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골'이라는 목표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목표 없이 공만 돌렸다면 그저 심심한 공놀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목표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목표'의 의미는 나에게 부정적이 되었다. 학창 시절 중간/기말고사 등의 시험, 대학 입시, 학점 얻기 등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20대 초중반을 지나 대학을 떠날 때가 되었고, 당시 나의 유일한 목표는 꽤 괜찮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목표 성취를 위해 청춘의 혈기를 억누르며 볼펜 딸깍하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섬세한 촉수를 가진 이들과 함께 도서관에 머물러야만 했다. 생전 관심도 없던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했으며, 지금도 회사생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미심쩍은 이런저런 대외 활동들을 해야만 했다. 그러한 생활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꽤 고난했고, 힘들었고,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목표라는 것은 나에게 갑갑하고 불편한 존재였다.
능력에 비해 운이 좋아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맡은 첫 업무는 영업 관리직이었다. 그곳은 단 하나의 이념만이 통용되는 곳이었다. '숫자가 곧 인격이다'. 매달 목표 수치가 있었고, 한 달 내내 이를 위한 활동들을 한다. 주어진 수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나는 인간이지만 인격은 없는 사람이 된다. 매달 말일이 다가오면 목표는 점점 나를 옥죄어온다. 마감 1주일 전이면 달성해야 하는 목표 스트레스로 인해 잠을 설친다. 잠을 자다 눈을 뜨면 시계의 시침바늘은 겨우 한 칸 움직였을 뿐이다. 하룻밤 새에 평균적으로 3~4번씩은 깼다. 적응하기까지 약 1년간 매달 1주일씩 그런 밤을 보냈다. 목표란 존재에 정나미가 뚝...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게 있어 목표란 이제 불편함을 넘어 지긋지긋하고, 혐오스러온 존재가 되었다. 목표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목표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비단옷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목표.
꽤 오랜 기간 동안 목표란 것 없이 살아왔다. 회사에서의 승진, 개인적인 성취와 관련하여 바라는 것이 없었다. 무언가를 바라게 될 때, 현재의 나와 괴리감을 인정하고 그것을 좁혀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들이 꽤 고난하고 힘들다는 것을 겪어봤기에 그러한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현자들의 말을 '지금 이 순간 그냥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다. 힘들고 머리 아프게 살지 말자'라는 의미로 이해했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당시 유행했던 '소확행', 'YOLO'를 몸소 실천했다.
썩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딱히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고추장 없는 떡볶이처럼 밋밋한 삶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2년 전, 회사 내에서 다이어트 펀드를 한 적이 있었다. 입사 때보다 체중이 13kg이나 늘었기에 가끔 울룩불룩한 내 몸매가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변하고 싶었다. 펀드이기에 성공하면 실패한 이들의 돈도 덤으로 얻을 수 있어 참여했다. 목표도 크지 않았다. 3개월간 체지방율 4%만 줄이면 되는 것이었다. 당시 32%의 체지방율을 기록하며 고도비만이었던 나에게 3개월간 4%는 그다지 어려운 수치는 아니었다. 조금만 신경 쓰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매일 작은 것들을 실천했다. 그리고 3개월 뒤 체지방량 4% 줄이기를 달성했다. 목표란 진절미가 나는 존재일 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과정들이 꽤 재미있고 신이 났다. 조금만 신경 쓰고 노력하면 목표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매일의 활력소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냈다는 것에 뿌듯했다. 이런 느낌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싶었다. 항상 달아나고, 피하고만 싶었던 목표가 금의환향한 순간이었다. 당시 이후로 3개월마다 다이어트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오고 있다. 그 결과 2년 전과 비교해 12kg의 체중을 감량했고, 체지방율 14%를 줄일 수 있었다. 10년 전, 20대의 마지막 시절을 보내던 당시와 비슷한 체형이 되었다. 목표 덕분에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었다.
목표가 우리를 옥죄는 수갑이 되지 않기 위해
올해 초 『퇴사 말고 휴직』의 저자 최호진 님이 진행하는 '버킷리스트 100개 수립' 워크숍에 참여했다. 해당 워크숍에서 약 3시간 동안 2020년 한 해 동안 내가 원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했고, 그것들을 포스트잇에 적었다. 자기 계발과 관련된 것(브런치 작가 되기, 하프마라톤 달리기, 영어 원서 3권읽기등),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부모님 모시고 여행 가기, 매주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요리하기 등), 그리고 개인적 유희를 위한 것(GOD 콘서트 가기, 슈가맨 방청하기, 혼자 1주일간 여행 떠나기 등)들을 올해의 목표로 잡았다.
대부분의 목표들은 현재의 나와 괴리감이 상당히 컸다. 하루 2천 보도 걷지 못한 내가 21km의 하프마라톤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할 순 없었다. 터무니없이 높은 목표는 쾌감을 주거나, 동기부여를 하는 것은커녕 그저 나에게 좌절감을 주는 장애물일 뿐이다. 칙센트 미하이는 몰입의 조건으로 ① 적절한 난이도 ② 구체적인 목표 ③ 피드백을 제시했다. 벽처럼 느껴지는 목표를 적절한 난이도로 변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프마라톤 달리기라는 목표를 예로 들어보겠다. 올해 2월 처음 달렸을 때, 나는 1.5km 밖에 뛰지 못했다. 3km를 목표로 했지만 달리는 도중 무릎이 아파 멈춰야만 했다. 이런 내가 21km를 달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목표가 가시성이 보이도록 조정해야만 했다. 하프마라톤이라는 연 목표 달성을 위해 매달, 매주 목표를 세웠다. 2월 3km, 3월 4km 달리기 등 매달 1km씩 거리를 늘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1주일에 최소 3회 이상씩 달리기로 했다. 월 단위, 주 단위까지 목표를 쪼개다 보니 이 정도는 노력하면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희망이 보였다. 작은 목표를 이행해갔다. 그렇게 첫날 3km도 달리지 못했던 나는, 현재 13km까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10월은 15km, 11월은 18km, 그리고 12월은 21km 하프마라톤 달리기가 나의 남은 목표이다. 매달 매주 목표를 이행하는 과정이 즐겁고, 점차 눈에 가까워지는 하프마라톤을 달리는 상상에 흥분된다.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들어왔던 속담 중,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것이 있다.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모으다 보면,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목표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그것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기에,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기에 그 괴리감으로 부담이 되고 압박이 되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 하루 약 20개의 목표가 있다. 아침 5시에 일어나기, 일어나자마자 이빨 닦기, 물 1.5L 먹기, 명상 10 분하기 등. 별로 어렵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사소하고 작은 목표들이 있기에 하루가 즐겁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활력을 얻고, 성취한 이후의 달콤함을 느낀다. 더 이상 하루가 심심하거나 밋밋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목표들이 하나씩 모여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큰 목표를 잘게 쪼개 적절한 난이도로 조정한다면, 목표가 더 이상 이전만큼 마냥 거부감이 드는 존재만은 아니게 될 것이다.
목표를 세웠는데 실패했다면..
우리는 지금의 나보다 더욱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목표는 이러한 열망을 가진 우리의 성장을 돕는다. 하지만 매번 목표를 성취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칭송받는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도 야투 성공률은 50%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과거 실패에 대한 학습으로 인해 목표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다. '목표를 세웠고, 해봤는데 실패했고, 결국 아무 변화가 없었다'라고 말이다.
예전 유럽에서는 납을 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연금술사이다. 이들은 끝내 금을 만들지 못했다. 실패했다. 현재의 우리는 연금술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로 인해 연금술사들은 영화에서, 혹은 소설에서 조롱거리가 되곤 한다. 어두운 곳에 숨어 살며 무언가 계략을 꾸미는 음침한 사람들, 비현실적인 허황된 것들을 좇는 모습으로 종종 그려진다. 하지만 비록 금을 만든다는 본래의 목적에는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은 절대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다. 화학이라는 학문으로 이어졌고, 이렇게 탄생한 화학은 질소비료를 합성하여 식량 증산에 이바지했다. 우리가 과거와 달리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실패한 연금술 덕분인 것이다.
우리는 쉽게 실패했다는 말을 사용한다.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실패하는 사람이라고 낙인찍는다. 목표란 것은 한없이 나를 작고 비참하게 만드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그것들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학습을 하고, 그것은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 몸에 근육으로 남는다. 매번 성취나 성공을 할 순 없지만 그 근육들은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패한 목표란 없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를 얻게 된다.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은 항상 '+' 게임인 것이다.
목표가 있을 때,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다. 성공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항상 무언가를 얻게 된다.
목표가 있기에 하루를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 게임 속 '미션 컴플리트'나 '도장깨기'처럼 말이다. 물론 가끔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성 취하고 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난이도의 목표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목표 있는 삶은 재미있다. 활력 있는 하루를 살 수 있게 해 준다. 이전의 나와 같이 여전히 목표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면,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보며 그러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계속 도전하는 한 그것은 실패가 아니야. 도전을 멈출 때 비로소 실패가 확정되지. 성공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거란다.
- 부자가 보낸 편지, 혼다 켄 저, 책이 있는 풍경 -
참고도서
* 『경영, 경제, 인생 강좌 45편』, 윤석철 저, 위즈덤하우스
* 『회사 말고 내 콘텐츠』, 서민규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