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여행
저는 현재 1년간 육아휴직 중인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휴직 여행' 카테고리는 휴직이라는 기간 동안 얻은 경험과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대학교 다닐 때입니다. 저는 '개트리오' 라는 그룹의 소속원이었습니다. '트리오'라는 이름에서 아시겠지만 마음 맞는 친한 친구 셋이 당시 인생의 최종 목적지로만 알고 있었던 대학교라는 곳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개처럼 놀아보자는 생각에 의기투합하여 만든 그룹입니다. 그룹원의 이름은 '개 망나니' '개 싸이코' '개 돌아이'. 저는 그중'개 망나니'를 담당했습니다.
저희 셋은 수시로 대학 강의를 소위 말해 '째고' 놀러 다녔습니다. 조조영화, 놀이공원, 노래방, PC방 등을 다녔고, 잔디밭에 앉아 수다를 떨었습니다. 가끔 출석한 강의에서는 교수님의 수업 시작과 함께 책상 위에 하얀 노트를 펴고 필기가 아닌, 빙고를 하거나 오목을 두었습니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2010년 직장인의 삶을, 2013년 남편의 삶을, 2014년 아빠의 삶을, 그리고 2016년 둘째를 낳음으로써 두 아이 아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름 많은 변화가 있었던 지난 10년인 듯합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변화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전만큼 맘껏 즐기며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물론 지금도 젊지만) 어른분들을 보며, '나는 나이 들어도 재미있게 살아야지'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제 모습은 당시의 어르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업무와 육아라는 쳇바퀴에서 웃음보단 한숨이, 즐거움보단 짜증을 부리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먼 훗날 우리》라는 중화권 영화가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랑했던 두 연인의 과거, 그리고 이별한 이후의 현재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계속 오버랩하며 시간이동을 하는데 그 촬영기법이 조금은 특이합니다. 연인이 함께 사랑했던 과거는 영롱한 색깔을 뽐내는 컬러러 보이지만, 이별한 현재는 흑백으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고 사랑하는 감정을 잃어버리면서 주인공들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체 세상이 무미건조한 무채색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젊은 시절의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을 재미없고 밋밋한 것처럼 보는 현재의 저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휴직을 시작하고 약 5개월이 흘렀습니다. 150일간 감사일기를 써오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달리기 독서 글쓰기 기타 연습 등, 그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육아휴직이라는 본분에 맞게 아이들과도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일기를 통해 일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고, 달리기를 통해 나도 언젠가 마라톤을 해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새롭게 하고 싶은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되고 (최근 이영미 님의 《마녀 체력》을 읽고, 하반기에는 사이클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생각을 붙잡아 되새겨보고, 유튜브로 기타를 배우며 최애 곡인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를 칠 수 있는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하루하루가 하고 싶은 것들로 꽉 채워져 있고, 지금보다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휴직 이전의 저는 빈약한 체력의 소유자라는 핑계로 만사가 귀찮았습니다. 회사에서 확고한 입지를 갖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 회사 외의 것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제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내뿜는 영롱한 빛깔들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휴직이라는 시간을 통해, 그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함으로써, 무채색으로만 보였던 세상이 시나브로 오색빛깔 찬란한 색깔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조금 더 즐겁고, 재미있고, 활기찬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 《언젠가는》중에서, 조은, 박웅현 님의《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여덟 단어》에서 발췌 -
휴직 이전,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과연 옳은 선택인가? 회사에서 앞으로 나의 커리어는 괜찮을까? 소득이 줄어드는데 어떻게 하지? 등등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 따윈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고작 버스나 기다리며 목 메달 지 않는, 세상의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고, 그리고 이 즐거움이 앞으로 제 인생의 중요한 원천이 될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