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이야기.
어렸을 때, 자주 어르신분들에게 들었던 말이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힘들어도 지금 이 고생이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라나 머라나... 어쨌든 결론은 젊어서의 고생은 언젠가 나의 삶에 큰 보탬이 될 거라며 그런 말씀들을 해 주셨다. 하지만 당시 나는 도무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고생을 사서해야 한단 말인가? 편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호위 호식하며 편하게, 그러면서도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는데 말이다.
휴직을 했다. 10년쯤 일했으니, 안식년을 갖고 싶었다.(물론 이런 제도가 있지는 않아 자체적으로 휴직을 선택했다) 첫째 따님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이들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개인적으로는 회사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하고 싶었던 것들에도 조금 더 시간을 들이고 싶었다. 많은 것들을 하고 싶었는데 그중 우선순위에 맨 상단에 위치한 것은 글쓰기 영어공부 달리기. 이 3가지이다.
어느새 휴직한 지 6개월이 흘렀다. 회사에서 해방된 나는 과연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며 멋진 휴직 생활을 보내고 있을까?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 글을 끄적대고 있지만 여전히 컴퓨터 키는 것이 망설여진다. 하얀 화면에 세로로 서있는 일자 모양의, 마치 나에게 얼른 글자로 자신을 채워달라고 보채는 것 같은 깜빡 거리는 검은 커서를 마주하는 것이 여전히 두렵다. 감히 나의 이러한 경험을 창작의 고통이라 부를 수 있겠냐마는 어쨌든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약 4개월간 매주 3회 이상씩 달리기를 하고 있다. 현재까지 달린 누적거리는 약 300km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달린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집 밖을 나서는 것은 어렵다. 이제 적응될 때도 됐는데 매번 달리러 나갈까 말까를 고민한다. 집을 나서는 순간에도 달리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떠오른다. 무릎이 아프네... 발목이 아프네... 허리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등등. 영어 공부는 주로 넷플릭스를 통해 하고 있다. 프렌즈, 굿 플레이스, 사우 스팍 등의 영상을 보며 섀도잉을 하지만, 별로 실력이 느는 것 같지는 않다. 더욱 심각한 건,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이젠 지겹고 지쳤다. 별로 하기 싫다.
글을 잘 쓰고 싶었고, 마라톤을 달려보고 싶었고, 영어로 유창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것들을 하고 싶어 휴직을 선택했다. 하지만 마크멘슨이 《신경 끄기의 기술》에서 말한 것처럼, '잘' 하고는 싶었지만 그것을 '잘'하기 위한 과정들은 썩 내키지 않았다. 잘하기 위해 견뎌야 하는 많은 과정들은 나를 지치고, 힘들고, 짜증 나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이루고자 나는 이러한 고생을 하는 걸까.
며칠 전, tvN에서 방영하는〈유 퀴즈 온 더 블록〉CEO 편을 봤다. 최근 우리에게 익숙한 마켓 컬리, 왓챠 등 대표적인 벤처기업 창업가들이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시청하는 내내 그들의 생각과 열정이 놀라웠다. 김슬아 대표(83년생), 박태훈 대표(87년생) 둘 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인데, 나는 감히 범접도 못할 에너지를 그들은 갖고 있었다. (물론 실력과 열정에 나이는 중요치 않지만, 그들보다 조금 더 산 나는 뭐 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유재석 조세호의 진행하에 그들과 인터뷰 형식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데 '왓챠'대표 박태훈 님이 이런 말을 했다.
하고 싶어서 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을 시작하고 나니,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99가지를 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했던 한 가지를 하기 위해 하기 싫은 99가지를 해야만 했다고 그는 말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선 괴로워도 멈추지 않고 글을 써야 한다.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는 책의 저자 안정은 님이 말한 것처럼 42,195km를 달리는 단 하루를 위해서는 수개월을 쉼 없이 준비하고 수백km의 연습이 필요하다. 영어 또한 리딩 스피킹 섀도잉들의 무수한 반복이 있어야만 내가 바라는 '잘'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모습은 단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거쳐, 그것들을 이겨낼 때 가능한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나보다 성공적인 사람은,
나보다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과연 고생 끝에 낙이 올까? 젊어서 고생은 과연 사서 해야 하는 걸까?
고생을 감내한 이들이, 나보다 먼저 고생을 자처한 사람들이 결국 지금 내가 바라는 모습에 위치해 있다. 내가 그토록 짜증내고 지겨워하는 이 과정들을 그들도 거쳤고, 그것을 극복해 냈기에 그들은 그러한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는 것이다.
아직 불혹까지 6개월 정도 남았다. 100세 시대이니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아직 인생의 반환점에도 이르지 않은 젊은 나이다. 아직은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안주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도전해보고, 조금 더 부딪쳐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말 그대로 아직은 좀 더 고생할 때이다. 조금 더 멋진 내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영미 님이 그녀의 책 《마녀 체력》에서 스튜어트 브라운의 저서 《플레이, 즐거움의 발견》을 인용한 부분을 소개해 보겠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다가 언덕이 나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저기 올라가기 싫어요. 너무 어려워 보여요.' 그들은 내려갈 때 무지무지 빠르고 신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올라갈 때는 힘들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신나게 내려오는 기분을 느낄 수 없다.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이 앞에 있다면 피하지 않고, 맞서고, 이겨내서 부디 내리막길을 신나게 내려올 수 있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