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다고들 한다.
첫째는 첫째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크고 작은 상처가 아니더라도 각각 어린 시절에 겪어야만 했던 어려움들이 있다. 맏이들은 맏이로서 늘 양보해야 했고, 책임감과 부담감을 함께 가져야 했고, 동생에게 부모님의 사랑을 뺏기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나의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두 살 터울의 오빠가 받는 사랑과 비교해볼 때 느끼는 상대적인 감정이다. 부모님의 애정이 나보다 오빠에게 더 많이 가고 있다고 느껴 이 부분에 대해 몇 번이고 서운함을 토했다. 기억하기로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러고 보니 내 십 대를 늘 따라다닌 생각이었다.
아홉 살, 다 같이 먹는 식사시간에 오빠 밥그릇에만 반찬을 올려주시던 엄마의 젓가락에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동그란 식탁에 모여 앉아 오빠의 밥그릇에 반찬이 올라갔을 때, 내 차례를 기다렸다. 안 보는 척 하지만 기대하면서 일부러 밥을 천천히 뜨고 있던 내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기다림에도 오지 않던 엄마의 젓가락에 식사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분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아홉 살의 소심한 아이에게는 너무 큰 서운함이었다.
열여섯, 진학할 고등학교를 정해야 했다. 오빠의 고등학고 진학을 앞두고, 원하는 고등학교를 적어서 내야 하는 가정통신문을 가져왔다. 엄마랑 오빠랑 나란히 엎드려 누워 종이를 바라보며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고, 나는 그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2년 뒤 나에게도 그 가정통신문이 왔고, 나도 엄마랑 나란히 누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 당시 하루하루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셨어야 했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으나 열여섯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오빠랑은 머리 맞대고 같이 했으면서 왜 나한테는 잘 생각해서 제출하라는 말만 하냐고, 왜 내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냐고.
열여섯 사춘기의 나는 꽤 힘들었다. 막내라서 혹은 여자라서 집안의 심부름을 늘 도맡아야 했다. 식사자리에 앉으면 물 가져와라, 가위 가져와라.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사이도 틀어졌고, 억울하게 당하는 일도 있었고, 오빠와 다섯 마디 이상이면 싸움으로 울음을 터뜨리면서 끝난 데다 엄마 아빠의 잔심부름이 그렇게 싫었다.
왜 나만 시키냐, 왜 나한테만 그러냐 울고불고 해도 하필이면 가정경제를 살리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어려우셨을 시기라 내 말을 들어주실 여력이 없었으리라. 사춘기의 열여섯은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 더 이상의 서운함을 표현하지도 않고 필요 외에는 방 안에만 들어가 있었다. 방 안에서 ‘하- 여기저기서 왜 다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 거냐. 어디로 혼자 나가버릴까. 내가 없어져봐야 이것저것 시킬 사람 없어서 소중한 걸 느끼시겠지!’라고 생각했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부모님은 내가 사춘기도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아기 때부터 순했던 나는 사춘기도 없이 순탄하게 컸다고.
‘내가 그렇게 힘들다고 티 낼 때 아무도 몰라줬으면서! 얼마나 화가 들끓었는데, 혼자 그 화를 달래느라 무척이나 애썼다고!’
처음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성인이 돼서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나도 사춘기 있었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의 서운한 기억들이 과연 가족들의 사랑이 작아서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거다. 넘치는 사랑과는 별개로 순간순간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겠지. 사소한 일들도 서른이 된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걸.
내가 기억하는 좋지 않았던 상황들만큼은 태어날 내 아이에게 경험하지 않게 해 주리라. 완벽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 아이가 서운하다 힘들다 이야기해준다면 그랬냐고, 그럴 수 있었겠다고 토닥여주며 아이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눠주리라 여러 번 다짐을 한다.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래’, ‘넌 꼭 별거도 아닌 거 가지고 그러더라’라며 결코 시덥잖은 소리겠거니 하찮은 감정으로 여겨 고개를 돌리지는 않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