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원 제이는 새로운 기능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일정과 인력이 터무니없었다. 경험으로 봤을 때 6달간 15명 정도 되어야 가능할 것 같은 프로젝트를 개발자 4명이서 3달 만에 수행해야 했다. PM이 팀장에게 찾아가서 따져 물으니, 경영진 중 이사 A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라고 했다. 그런데 이사가 우리 팀에서 그 프로젝트를 담당했으면 한다고 했다. 이미 한다고 약속을 해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제이는 기가 막혔다.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면 6개월간 매일 야근도 모자라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실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PM이라면 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경험과 상상을 적절히 조합하여 써본다. 위와 같은 상황을 터널링(tunneling)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상사의 상급자인 사람이 시키는 일을 상사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받아와서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 같다. 조금 더 자세히 검색해보니, 역시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부정부패나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다. (물론 많은 경우 개인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부재로 위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 프로젝트를 구상 단계에서 해당 프로젝트의 대체적인 윤곽을 파악한다.
이사 A가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만약 PM에게 미리 질문을 했다면, 해당 프로젝트의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해야 한다.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는 무엇인지, 할당할 수 있는 자원은 어느 정도인지, 예상되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만약 이 단계에서 꽤 규모가 크고 힘든 프로젝트라고 생각이 든다면 이사 A에게 어느 정도 언질을 미리 주고, 추후 상세한 윤곽이 나오면 한 번 더 알려달라고 한다.
2. 일단 반대한다.
이사 A가 친절한 상사라면 프로젝트 구상 중에 나에게 미리 구두로 언질을 주었겠지만, 그런 이야기 없이 어른의 사정(?)이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바로 우리 팀에게 프로젝트를 맡기려고 한다면 어떤가? 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내용을 살펴봤더니 도저히 할당된 예산과 인력으로 수행이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나의 경우는 일단 바로 거절하는 방향을 선택할 것이다. 또 거절한 내용을 근거와 함께 이메일로 첨부해서 이사 A에게 발송하여 근거를 남겨야 한다. 반대한 내용이 추후에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우리 팀이 책임을 온전히 짊어지지 않을 수 있다. 주니어의 경우 이러한 프로젝트 요청을 받았을 때 면전에서 바로 "Yes"를 질러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나는 일단 프로젝트 관련 자료를 전달해달라고 요청 한 다음에, 프로젝트 내용을 확인 후 00일까지 알려주겠다고 할 것이다.
3. 팀원에게 공유한다.
이사 A가 비밀로 할 것을 요구하지 않은 이상. 이 단계에서 팀원에게 해당 내용을 가감 없이 공유해 의견을 들어야 한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실제로 그렇게 어렵지 않은 프로젝트일 수도 있고, 오히려 팀원들이 하고 싶어 하는 프로젝트일 수도 있다. 내 판단이 맞는지 확인을 하기도 해야 하고, 추후 이사 A와 협상을 하는 경우 팀원의 의견을 바탕으로 팩트가 되는 근거를 탄탄히 다질 수 있다.
4. 협상을 시도한다.
이사 A가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우기면 어떤가? 이사 A가 나의 직접 상사라 더 이상 거절했다간 나와 우리 팀원들에게 피해가 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또는 회사의 운명이 걸린 프로젝트라 무조건 해내야 할 수도 있지 않은가?(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이사 A가 전달한 프로젝트 문서를 바탕으로 협상을 시도한다. 이렇게 협상을 하다 보면 제한된 예산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는 상황까지 갈 수도 있다. 하지만 A의 기대치가 너무 높거나 협상에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협상은 결국 결렬될 것이다.
5. 기록한다.
터널링 상황이라고 인지되는 순간, 1~4와 그 이후 과정들은 반드시 꼼꼼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사 A가 높은 실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한 책임을 묻는 것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고 추후 해당 프로젝트 실패를 우리 팀원이 뒤집어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6. 정확히 수행한다.
터널링이라고 인지되는 순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순간에는 이사 A의 지시를 최대한 정확히 수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차피 실패할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지시사항을 어기는 순간 그 지시를 어겨서 프로젝트가 실패했노라고 뒤집어쓸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야 업무 지시사항을 정확히 이행했음에도 실패했다는 명분이 생긴다. 만약 지속적으로 불가능한 지시가 계속 내려오는 경우 1~5의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지치겠지만 어쩔 수 없다.
7. 팀원에게 위의 전 과정을 상황이 발생하는 즉시 공유한다.
반드시 우리 팀 팀원에게 위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팀의 신뢰가 깨지고, 다음 프로젝트에도 영향이 간다. 문서로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팀원들의 직접적인 증언이 있어야 팀원들이 서로를 스스로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팀장은 슈퍼맨이 아니다. 위 과정을 아무리 꼼꼼히 한다고 하더라도 누락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미 터널링 상황에 놓인 시점부터 팀은 아주 큰 위기이다. 그 위기를 함께 헤쳐나갈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팀 내부의 투명한 공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8. 터널링의 책임은 팀장이 진다.
만약 터널링이 발생한 후 그 책임을 팀원에게 지게 한다면, 그 팀은 그 이후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팀원의 신뢰를 읽는 것은 한순간이다. 팀원의 협조 없이 성과를 낼 수 있는 매니저나 팀장은 없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반드시 본인에게 큰 타격으로 되돌아온다.
위 전략의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말과 글이 자유롭지 않은 환경에서는 구사할 수 없는 전략이다. 말과 글이 자유롭다는 게 얼마나 큰 가치인지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또한 위 전략을 구사하는 동안 리더와 팀원들은 매우 큰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된다. 만약 실패에 관대한 문화를 가진 회사에 가거나 개인의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문화를 가진 회사에 간다면, 그리고 합리적으로 의사 결정하는 회사에 간다면,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이긴 하다. 다만 인생이라는 게 내 뜻대로만 되라는 법은 없고 여러 회사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 번쯤 반드시 겪게 될 문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