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고속도로, 오후 세 시

경인고속도로, 오후 세 시

by 덕용안

경인고속도로, 오후 세 시



앞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앞차의 앞차도 움직이지 않는다. 도로가 하나의 주차장이 되어버린 오후, 나는 핸들을 잡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중이다.


내비게이션이 도착 예정 시간을 자꾸 바꾼다. 처음엔 사십 분이라더니 오십오 분이 됐고, 잠깐 사이에 한 시간 십 분이 됐다.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이상하게 체념이 빨라진다. 어느 지점부터는 얼마가 더 걸리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된다. 막힌 도로 위의 체념은 이렇게 빠르게 온다.





창밖으로 옆 차선이 보인다. 저쪽이 조금 더 빠른 것 같아서 차선을 바꿨는데, 바꾸고 나니 아까 내가 있던 차선이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바꿨다.

알고 있는 것과 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도로 위에는 참 많다.


차선 변경에 대한 심리학 연구가 있다는 것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결론은 대략

차선을 자주 바꿀수록 실제 도착 시간은 별로 달라지지 않고 피로도만 높아진다는 것.

읽었을 때는 그렇구나 싶었는데, 막상 도로 위에 서면 그 연구 결과가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것이 필요한 순간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알면서도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어리석음인지 인간적인 것인지, 막힌 도로 위에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라디오를 켰다. 노래가 나왔는데 잘 모르는 노래였다. 그냥 두었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고 싶어지고, 따라 부르다 보면 가사가 생각보다 기억나지 않아서 어색해지는 경우가 많다. 모르는 노래가 배경으로 흐르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라디오 진행자가 무언가를 얘기했다. 귀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교통 정보였던 것 같다. 어디가 막히고 어디가 뚫렸다는

지금 이 안에 있는 나한테는 그 정보가 별로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막혀 있으니까.




앞차의 번호판을 보게 됐다. 특별히 보려던 것은 아닌데,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눈이 어딘가에 가 닿는다.

숫자 조합이 뭔가 이상하게 익숙한 것 같아서

무슨 숫자인지 기억하려고 했는데, 기억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뒀다. 기억할 이유 없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시도를 막힌 도로 위에서 몇 번 했다.

그것도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다.


옆 차에 개가 타고 있었다. 조수석 쪽 창에 코를 붙이고 밖을 보고 있었다.

귀가 접혀 있었고 눈이 조금 처져 있었다.

막힌 도로가 지루한지 재미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개한테 물어봐도 모를 것이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그 개가 인천에 가는 것인지 다른 데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 표정을 보고 있었다.

막히는 길 위에서 옆 차를 오래 보는 것은, 딱히 이유가 없어도 되는 일이다.





어느 순간 잡생각이 시작됐다. 순서는 없었다. 몇 주 전에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르더니,

그 말이 적절했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됐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다른 생각으로 넘어갔다. 냉장고에 뭐가 남아 있는지, 돌아오는 길에 마트를 들러야 하는지, 마트에 들어가면 사야 할 것 말고 필요 없는 것을 살 것 같다는 예감까지 이어졌다.


생각이 이렇게 흐르는 것이 원래 생각의 방식인데, 뭔가를 하고 있을 때는 모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만 이 흐름이 눈에 보인다. 막힌 도로가 나쁜 것만은 아닌 이유가 있다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잠깐 볼 수 있다는 것.


그 생각들이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가 오늘의 핵심 의제가 될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도 그 생각들이 왔다가 간 자리가 어딘가에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어디에 쌓이는지는 모르지만.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앞차가 실제로 이동하고 있었다.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십 미터쯤 갔을까, 다시 멈췄다.


그래도 방향은 인천이다. 멈춰 있는 동안에도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위안인지 당연한 것인지

막힌 도로 위에서는 위안처럼 느껴진다.


내비게이션이 다시 숫자를 바꿨다. 한 시간 삼십 분.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별 감흥이 없다.

체념이 완성된 것이다.

완성된 체념은 생각보다 편하다.

저항할 이유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그냥 지금 여기인데, 지금 여기가 막힌 도로 위 운전석이라도

나쁘지 않다. 적어도 개도 있고, 잡생각도 있고, 모르는 노래도 있으니까.

서두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서두르지 않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상하게도.



월, 화, 목, 토 연재
이전 06화파란 조끼와 고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