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할 이유가 하나 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 시절 출근길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고속도로 위의 가로등 불빛부터 생각난다.
어두운 새벽에 등간격으로 서 있던 그것들이 차창을 지나치는 속도로.
그 불빛들이 그립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세 번째 센터는 달랐다.
뭔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두 번째 센터에서 끝내 받지 못했던 프로그램 접근 권한들이, 여기서는 신청할 때마다 하나씩 승인이 됐다.
사소한 것 같지만 그게 사소하지 않았다.
화면에 잠금 표시가 있던 메뉴가 어느 날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는 감각
작은 문이 하나씩 열리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그 센터에서 처음 알았다.
쓸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것이, 의외로 사람을 꽤 열심히 하게 만들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꺼내야겠다.
사수가 여자였다. 작고, 예쁘고
이 두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데, 굳이 더 하자면 딱 내 이상형이었다. 그래서 좋아했다.
사수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 라인이라고 해야 할지, 줄 서기라고 해야 할지
현장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어느 쪽에 붙느냐가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나는 그 사수 쪽을 선택했다.
이유를 전부 업무 때문이라고 하면 조금 거짓말이 된다.
좋아하는 방향으로 몸이 먼저 기울 때가 있다. 머리가 납득하기 전에.
사수는 꽤 엄격했다. 부족한 점을 그냥 넘기는 사람이 아니어서, 뭔가 틀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짚었다.
처음에는 그게 좀 부담스러웠는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요구받는 것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기대를 받는 것과 압박을 받는 것은 내용은 같아도 온도가 달랐다.
그 당시 엑셀을 잘 못 했다. 업무 특성상 수식이 들어간 파일을 만들어서 돌려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부터 막막했다. 퇴근 시간이 됐는데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사수가 옆에 앉았다. 업무가 끝난 다음이었다. 내가 못 하는 수식을 직접 넣어줬고, 파일 구조도 만들어줬다. 오래 걸렸다. 그 사람도 피곤했을 텐데
그 생각을 그때는 잘 못 했다.
점심을 거른 날이 있었다. 바빠서인지, 별 생각 없이 지나쳐서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어디 있냐고. 밥 먹었냐고. 그 한 마디가
어떤 이유로 마음에 남았는지는 설명하기가 좀 어렵다.
큰 일이 아닌데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다. 그 전화가 그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업무 이야기 외에는 선을 만들어 두고, 그 선 안에서만 움직였다.
그것이 현명한 것인지 비겁한 것인지는 지금도 판단이 잘 안 서는데
어쨌든 그렇게 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서랍 안에 두고, 매일 그 서랍 위에 앉아서 일을 했달까.
말하지 않은 것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에 그대로 쌓이는 것인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출근길을 달라지게 했다.
150만 원짜리 차가 고속도로에서 내던 그 진동이, 어떤 아침에는 덜 느껴졌다.
이유를 대자면
오늘도 거기 있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가 핸들 잡는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던 것 같다.
출근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지금은 그 센터에 없다. 그 사수도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 됐다. 그래도 그 시절 새벽 고속도로 가로등이 생각날 때, 그 불빛들 사이 어딘가에 그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좋아했다는 것은, 그렇게 풍경 속에 섞여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