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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minic Aug 10. 2024

대책 없이 낭만적인 죽음

우울한 모든 이들에게

https://youtu.be/YQm8p5J5sdQ?si=Jg2weHsQa1dtL94d




나는 어떤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죽음을 바라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냐는 것이 그런 이들의 평범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어떻게 죽을 생각을 안 하셨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죽음을 낭만화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한 번도 죽음을 최후의 해결 방법이라는 자리에서 끌어내려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죽음에게 위대한 지위를 부여했다. 아주 힘든 날에도 죽고 싶어 했고 너무나 완벽한 날에도 죽고 싶어 했다. 삶의 찬란함과 알 수 없는 죄책감 사이에서 헤매기를 즐겼다. 죽는다는 건 정말이지 완벽한 일처럼 느껴졌다. 정확히는 지금 죽으면 딱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내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엄숙한 절대성은 나를 편안하게 했다. 내일 내게 더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죽음보다 더 좋은 이벤트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생각이 살아가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을 탁 끊는 것처럼, 죽음을 떠올리면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안 되면 죽지 뭐. 대부분의 일들은 내가 죽기 전에 해결이 됐다. 그러면 나는 이번에도 비껴간 죽음이라는 필살기를 아끼고 아끼며 다음날 눈 뜰 각오를 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죽음이라는 아이디어에 푹 빠져 있을 동안 일어난 일들이 나를 구성했다. 그렇게 주의 깊게 선택되지 않은 사건들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것들을 세포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나를 더욱 죽음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세상은 원래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게 가장 자유롭게 허락된 것은 죽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죽음도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매 초 느끼지 않나?


내 삶의 종결권이 내게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최후의 자긍심일지도 모른다. 순간순간 치받는 욕구는 분노와 닮아 있었다. 이 세상이 역겨워 나는 떠난다. 나의 부재를 너희는 슬퍼하다 잊으리라.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처럼 나는 뻗댈 것이다. 아등바등 살아가기에 너희는 너무나 폭력적이었고 나는 너무나 정결했다고, 최후로 증명하겠다. 잊힘이라는 주제는 죽음 앞에서 너무나 사소해서 그것에 아쉬워할 조금의 가치도 나는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 자살은 남에게 화를 낼 용기 없는 사람들의 전유라고 말했다. 밖에다 소리치지 못해 굴절 분노를 자신에게 붓는 것이라는 의견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일일까 의문한다. 자발적인 침잠은 아늑하다. 이대로 가라앉는 감각을 만끽하고만 싶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에게도 죽음이 대책 없이 낭만적인가를 묻고 싶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갈 기차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낭만, 그 외의 모든 일은 사소한 것으로 전락하는 무감, 멀리 들리는 기차 경적 소리에 들뜨는 철없음, 언제고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과 초탈. 그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플랫폼 위에 있다. 어쩌면 인생이 재미없는 이들에게 이만큼 행복한 상상은 또 없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말에 슬퍼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한낮에 취한 사람처럼 단 한 번의 마지막 관문에 대해 상상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죽을 생각 하지 말라고 하는 건 불가능을 말하는 것에 가깝다. 열정을 삶보다 죽음에 쏟고 싶어 하는 깐깐하고 콧대 높은 철부지들에게 그런 현실적인 충고는 들리지 않는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 그 간절함을 기만하지 말라는 분노는 더더욱 닿지 않는다. 기실 이 사람들은 누구보다 분노할 줄 아는 철학 중독자들이기 때문이다. 백색 왜성처럼 하얗게 그들은 중력을 견디고 있다. 죽지 말라고 하는 건 쓸모없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내일 당장 죽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 그냥 우리는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다. 가장 원하는 형태로, 대책 없이 낭만적이고 완벽하게 내 이야기의 종장을 찍기 전까지는. 그리고 필연적으로 결벽 떠는 철학 중독자들에게 완벽은 닿을 수 없는 이데아다. 죽고 싶어 하는 이들은 곧 너무나 완벽하게 삶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죽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말하자면, 낭만을 즐기되 실수는 하지 말라고 전하겠다. 세상의 많은 일들처럼, 절대 원하는 형태의 죽음은 만들어 낼 수 없다. 당신의 조급한 죽음의 모습은 마구 쓰고 내놓은 리포트처럼 아쉬울 것이다. 격조했던 친구처럼 죽음을 기다려라. 바깥에 화를 내고 욕을 먹어라. 몸에 오물이 얼마나 묻든 우리가 상상하는 죽음은 우리를 깨끗이 데려갈 것이다. 아무것도 소용없다고 믿는 고고한 자세로 똑같은 인간들을 만나며 질색해도 좋다. 나는 그것을 구경하며 손뼉 치겠다.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좋다. 본격적으로 취하기 전 와인을 시음하는 사람처럼 당신 주위의 세계를 맛봐라. 죽기 전까지의 한갓진 일탈로 훌륭할 것이다.




사족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참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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