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연예인 보고 괴물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요
최근 <괴물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구입했다. 자주 가는 북 카페에서 빨간 표지에 분홍색 글씨로 제목이 표기된 이 책을 발견했는데, 진열대에서 책등을 만지작거리다 한 권을 집어 들어 구매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위대한 걸작을 탄생시킨 괴물 예술가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책의 뒷면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다소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긴 하지만 무언가에 깊이 빠져 소위 ‘덕질’을 해본 적 있는 문화예술탐방가라면 자신의 행적을 마주하며 천천히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어째서 우리는 점차 예술작품과 창작자인 예술가를 완전히 분리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예술가의 인격을 작품 자체의 뛰어남이라는 요소와 거의 비등한 수준으로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이 책은 작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시선과 팬덤 문화, ‘독보적 예술성’을 위한 조건, 윤리, 감정과 같은 주제를 엮어 다루고 있다.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나누고 싶은 부분은 아래와 같다.
창작자의 전기와 나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언제 어디서나 재확인된다. 관계의 신호 품질은 바로 친밀감이다. 우리는 유명인에 대한 정보가 많으면 그들을 안다고 느낀다. 그들에게 친밀하게 접근할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내가 보건대, 이 감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매년 인터넷에 접속한 시간이 쌓여 갈수록 우리는 이 공적 인물들과 더 친밀하게 얽히는 느낌이 든다.
‘유사 사회관계’라는 표현은 그동안 연구자들만 사용하는 사회학 용어였으나 인터넷에 대해 논하면서 점점 더 자주 등장한다. 이 표현이 상용된다는 사실은 이 표현이 설명하는 현상이 증가한다는 뜻이다. 즉, 팬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가들과 진짜 감정적 유대를 갖고 있다는 믿음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단순히 창작자의 작품을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다.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느낌이고 친구가 되었다는 느낌이며 더 나아가 그 사람도 나에 대해 똑같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괴물들Monsters, 77p.
왜 우리는 정치색을 드러낸-실수로든 또는 고의로든-유명인에게 실망할까?
어떤 연예인을 좋아할 때 정치색을 먼저 따지는 일은 잘 없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매력 어필의 기능을 수행하긴 하겠지만, 솔직히 ‘입덕’을 할 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외적으로 관찰 가능한 그 연예인 본인의 매력이 아닌가? 목소리가 좋아서, 연기를 잘해서, 외모가 뛰어나서, 춤을 잘 춰서, 그 외의 여러 가지. 일견 정치적으로 누구를 지지하는가 하는 물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매력은 왜 정치색 때문에 퇴색되는 것인가, 그 얘기다.
이제 우리는 작품을 곧 창작자 또는 퍼포머와 거의 동일시하고 있고, 위에서 인용한 <괴물들>의 몇 문단처럼 그들의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명인의 작품, 유명인의 성격, 유명인의 유머와 MBTI, 가족관계, 과거 행적까지 소비하면서 유명인에 대해 더 깊게 알 수 있고 그에 따라 점점 더 그와 연결되어 간다고 느낀다. 그리고 기대한다. 그는 이제 내가 아는 ‘그 사람‘이고, 철저한 애정과 검증의 관문을 거쳤으니 그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항상 모든 일은 기대하는 대로만 굴러가지는 않는다. 어느 날 우리는 그 유명인의 이름이 마구 오르내리는 것을 발견한다. 그 사람이 왜? 너 몰라? 걔가 그랬대. 세상은 무너진다.
소비를 통해 신념을 드러내는 것이 당연한 코드로 자리 잡은 현재 사회에서 소비란 곧 애정이다. 동시에 고민의 결과이다. 열심히 저울질한 결과 이 상품을, 이 예술작품을, 이 작품의 주연을, 그 사람을 신용하고 구매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신경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미세하게 바로 그 유명인을 되새길지를 상상해 보라. 뮤지컬 <시카고>의 주인공 록시 하트는 이렇게 외친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니까 나도 그들을 사랑하고, 내가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도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다 우리 모두 어릴 적 겪은 애정 결핍 때문이라구요. 그리고 이게 바로 쇼 비즈니스라는 거예요!’ 이 쇼 비즈니스에 관한 정확한 진단을 곱씹어 보라. 중요한 것은 ‘연결감’, 바로 그것이다. 그냥 쉽게 말해서 ‘너도 나랑 똑같이 생각할 줄 알았어...’라는 거다.
생각이 다르다고 그렇게 애정을 줬던 존재를 함부로 팽해도 돼? 그거야말로 이상한 거 아냐? 그런 의문이 슬그머니 가슴 한편에서 머리를 들이밀 때가 됐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2025년의 한국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계엄령 선포 이후 탄핵안 가결, 탄핵 인용 선고가 내려지기까지 꾸준히 광장을 지킨 주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사랑하니까 궂은일도 감내하는 이들. 누군가의 팬들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평화시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사랑하는 마음’을 견인의 에너지로 사용했고, 그 많은 깃발과 응원봉, 지치지 않는 노래를 기꺼이 바치는 모습이 매스컴에도 올랐다. 이런 배경과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가지고 있는 연결감을 한데 두고 생각해 보면, 소비자가 연예인에게 실망하는 일이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무 힘들어하진 마세요
더 길게 말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 없는 사족만 달게 될 게 뻔하지만, 마지막 문단을 쓴다. 정치색이 잘잘못의 범위인가를 판단하는 일-각종 범죄와 비윤리적 행동의 경우에는 분명히,당연히,명백히 잘못이다-을 유보해보자. 실망을 안겨 준 연예인을 떠올리며 ‘내가 그를 이렇게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가?’ 스스로 물어볼 것을 안다. 최소한 실망스러운 사건이 진실이라면, 그간 유명인이 쥐고 있던 관계의 칼자루는 다시 당신에게 돌아왔을 것이다.-부정하고 싶겠지만 당신이 그를 사랑하는 이상, 그동안은 거의 대부분 유명인의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졌다-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경험상 충고하건대 본인의 감정에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 딜레마라는 건 알지만 어쨌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비판을 곁들인 애정의 가시밭길과 완전한 헤어짐의 시원섭섭함 사이에서 말이다.
사족
특정 유명인을 비난하는 데에 숟가락 얹으려는 글은 아닙니다만 혹여 그렇게 보인다면 제가 좀 더 글 잘 써보도록 노력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