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다는 것
매미 울음소리가 처음 들리던 날이었다. 평소에는 회사까지 걸어서 출근하지만, 아침부터 더운 바람을 맞으며 걸을 자신이 없어 통근버스를 타기로 했다. 주차장을 지나 작은 놀이터를 가로질러 아파트 단지 한편에 있는 쪽문으로 향했다.
며칠간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구름도 산너머로 물러간 하늘은 기분 좋은 파란색이었지만, 이런저런 고민으로 밤잠을 설친 나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다음번 인사발령에는 어디로 가게 될지, 곧 다가올 열대야에 어떻게 잠을 자야 할지, 여름휴가를 준비하면서 잊은 건 없는지 등등(말 못 할 고민들까지).
아침까지 이어진 생각들이 산책길의 날파리떼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손을 휘저어 쫓을 수도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나이가 들면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낼 것 같았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걱정과 두려움도 함께 늘어났다.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주문만으로는 심장에 얹혀 있는 돌을 치울 수 없었다.
무거운 걸음으로 아파트 쪽문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를 보았다. 6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어르신이었다. 날렵한 체형에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모자와 지팡이까지 챙겨 들었다. 설악산에라도 갈 듯한 모습이지만, 그가 산에 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팡이를 쥔 오른손은 불안하게 흔들렸고, 살짝 구부린 무릎과 발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두 눈은 쪽문을 노려보았고, 난간을 향해 뻗은 왼손은 허공을 가위질하고 있었지만, 내가 한참을 걸어오는 동안에 겨우 한 걸음을 떼어 놓을 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문득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이 과연 걷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균형을 잡고 일정한 속도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신경계와 근골격계의 복잡한 작용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고도의 복잡한 작용을 일일이 생각해서 해야 한다면, 아마도 나는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는 고민들이 걷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는 답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무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내 안에 들어왔고, 지겹게 따라다니던 날파리떼가 사라졌다.
아파트 쪽문을 빠져나온 나는 고민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춘기 아이와의 관계가 힘든 건 어른이 되어가는 자식을 여전히 어린아이로 대하기 때문이고, 어디로 발령이 나든 그곳에서 할 일은 정해져 있으며, 여름이 더운 건 자연의 섭리이니 그냥 참든지 에어컨을 켜든지 해야 할 터이고, 여름휴가를 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인 것이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파란빛에 눈이 부셨다. 밤 사이 내린 비에 불어난 개울을 건너, 초록이 무성한 가로수 길에 접어들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통근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