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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루나무 Sep 24. 2020

지금 잠시 멈춰 있는 거예요

슬럼프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 한 스푼

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우울증은 계단식으로 올라가는데 은아 씨는 올라가다 지금 잠시 멈춰 있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슬럼프인 거죠?”

“아뇨, 나아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한 달이 지나고 좀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슬럼프가 찾아왔다, 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슬럼프는 내가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잠시 멈춤'은 다시 말하면 정체기인 거니까. 그만한 실력은 있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아 잘 하던 사람도 갑자기 못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시기가 있는 것과 같으니까. 사람마다 그때 드러나는 감정, 기분, 생각은 제각기 다르지만 괜찮아지는 듯한 느낌이 있다가 어느 순간 우울해지고 더 힘들어지며 불안해지는 때가 온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슬럼프라고 생각했다.

 

지난 화요일에 방문했을 때 힘든 시기에 대해 쓴 글을 보여드렸을 적에는 긍정적이었다.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으니까, 갖은 노력과 엄청난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처럼 드디어 프리랜서가 됐다고,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울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기도 했고 되게 좋아지고 있다고, 굉장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주 월요일, 갑자기 울었다. 부산에서 힘들었던 기억과 고시원에서 빚더미에 올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그때 생각하면 정말 죽고 싶었다. 거기에 우울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비교적 최근에 겪은 공허하고 허망한 감정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게 했다. 게다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생각까지 더해지니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죄다 나에게 와 있는 듯했다.


어제는 엄마가 최근에 핸드폰을 바꿨는데, 쓰레기 좀 버려달라며 나에게 맡긴 봉투에 전에 쓰던 스마트폰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하필 안에 있는 리튬 건전지가 부풀어 있는 상황이라 조금만 더 지나면 터진다고 스마트폰 바꾸러 간 매장의 직원이 말했었다. 그래서 쓰레기를 버리고 나서 그 핸드폰을 내 가방에 넣어두고 일단 걸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넣고 걸어도 아무 생각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뉴스에서 간간이 들리는 핸드폰 배터리가 터졌다는 이야기가 걷는 내내 생각났고, 터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불안에 떨었다. 식은땀이 계속 나면서 갑자기 어지러웠다.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가빠졌다. 공황증상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나타났기에 세탁소에 얼른 가서 맡겨둔 이불을 찾아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는 동안 괜찮다고, 안 터진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그런데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잠깐 걷는 몇 분이라는 시간과 엘리베이터를 타는 몇 초 동안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불안장애를 넘어서 공황장애가 또 온 것이다.


집 앞에서 마주친 엄마에게 부푼 핸드폰을 전할 때는 이미 그 증상을 온몸으로 겪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거 같이 줬다면서 돌려주고는 얼른 밖으로 나가려고 했더니 잠깐 들어오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핸드폰 가게 가는 거 아니냐고, 가는 길에 신발도 맡겨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너무 짜증이 나서 "그걸 왜 이제 말해!" 하니까 미안하다고 연신 그러더니 나간 김에 갔다오라고 하는 것이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았지만 빨리 달라고 해서 다시 세탁소 갔다가 휴대폰 매장 가서 여분의 충전기와 잭, 핸드폰 화면을 보호할 수 있는 풀커버 방탄유리를 받고 마트에 가서 장을 본 뒤 집으로 왔다.


생각해보면 엄마에게 좀 미안하다. 날이 더운데 거기에 무거운 물건까지 들고 날라야 해서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까지 짜증을 냈어야 했나 싶다. 하지만 터질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모를 만큼 엄청난 공포로 작용한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앞이 보이지 않아 더 무섭게 느껴진다. 아득해지며 갇혀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러니 스트레스가 무서운 것 같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우울, 불안, 불면증, 공황장애가 생긴다. 거기에 식욕도 줄어들고 무기력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때문에 사람 만나는 일을 꺼리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꿈은 무엇인지 잊어버린다. 점점 집 안에만 있게 되고 밖을 나가지 않는다.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여기서 심해지면 사회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조차 하기 힘들어진다. 유지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해보다가 안 되면 결국 모든 것을 그만두고 누워만 있는다. 침대에만 눕고 싶고 파묻히는 것 같다. 눈물만 계속 나고 울기만 한다. 얼마나 힘든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오늘 선생님에게 잠시 멈춰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또요?” 라고 되물었다. 믿기지 않아서였다. 믿을 수 없었다. 저번에 한 번 와서 괜찮겠지 했는데 또 오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들었지만 잘 이겨냈고 그러고 나서 좋은 일도 있었다. 쉽지 않겠지만 또 버텨야 할 것 같다. 버티는 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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