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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루나무 Sep 28. 2020

죽지 못해 사는 인생도 살 만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정신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8시에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밖을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는지, 월요일 밤까지 복용했던 약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끊은 채 항불안제만 먹어서 그랬는지 10시 넘어서 일어났다. 8시에 깼지만 새벽에 악몽을 꾼 데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해 피곤함이 올라와 그대로 자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아차 싶었다. 아침까지 보내주기로 한 원고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관련 잡지까지 산 마당에 어제까지 집에 가면 옷 갈아입고 잡지 보고 생각해두어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무너져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잠들었고 모든 스케줄이 어그러질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바로 연락해서 오후 3시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 콜라겐 석류 젤리를 입에 문 채 한 출판사에서 나온 문학 잡지의 신인상 심사평과 수상작을 읽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읽고 나서 바로 같은 출판사의 계간지를 똑같이 읽었다.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을 밑줄 긋고 핵심 부분에 동그라미를 치며 어떻게 피드백을 주어야 할지 파악해나갔다.


그러고 나서 1시 반쯤에 원고를 봤다. 평소라면 아침 겸 점심을 먹지만 오늘같이 바쁜 날이면 과감히 생략한다. 전부터 나의 철칙이라 하면 마감날에는 반드시 시간을 지키기 위해 한 끼 정도는 거르고 일만 하는 것이다. 전부터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는 투잡을 몇 년 간 해온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스물여섯까지는 세상에서 돈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대학생들이 국가장학금을 받기 바로 전 대학교에 들어간 나는 1학년이 되기 직전인 열아홉에 300만 원이란 빚을 졌다. 등록금과 입학금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한 학기마다 내야 하는 몇 백만 원의 등록금과 높은 등급을 받아야 하는 수업과 부산에 가서 살아야 했기에 내야만 했던 월세에 온갖 세금까지 모든 것은 오로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1학년 2학기가 되자 한국장학재단이 출범해서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왔고 그나마 적은 이율로 학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이것만’이었다면 힘들어도 대학교를 남들처럼 졸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평범하게. 하지만 삶은 더 없는 깊이가 아주 깊어 도저히 빠져나오기 어려운 구렁텅이로 빠진다. 스물한 살, 어리다면 어린 그 새파랗던 청춘에 또 다시 850만 원이라는 그 나이 때에 쉽게 질 수 없는 빚을 지게 된다. 어쩌다 그랬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사정이라고밖에 표현을 못 하겠다. 미안하지만 그렇다. 그때 당시에 좋은 일 하겠다고 빚을 졌다. 정말 좋은 일에 쓰였다. 하지만 이유는 밝히기 어렵다. 그러니 양해 바란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쓰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해서 빚을 졌다. 어린 나이에 무슨 사정이 있어 그런 일을 겪었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런 일이 정말 있다. 드라마 같지만 실제로 겪었다. 하루 아침에 빚쟁이가 됐다. 학자금 이천 몇 백만 원에 개인 사정으로 진 빚 850만 원까지. 스물세 살의 겨울, 돈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850만 원의 이자를 갚기 어려운 날이 찾아왔다. 은행 빚이 아닌 제3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았기에 이자율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지금 기억으로는 24.9%였던 것 같다. 당시 일해서 번 돈으로 원금과 이자를 한꺼번에 갚느라 한 달에 25만 원 이상은 그곳에 들어갔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세 곳의 저축은행에서 빌린 돈을 어떻게 해서든 한 곳으로 줄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알아보다 눈에 띈 것이 대환대출이었다.


조사해보니 여러 곳의 대출을 한 곳으로 모으고 갖고 있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제각각이던 이율을 한 저축은행에서 맡아서 관리해주는 방식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에 여기저기 전화했지만 신용등급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몇 번이고 거절을 당했다. 하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고, 사투 끝에 한 곳에서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터넷에서 알아보다 어떤 분이 전화로 내 사정을 듣고 소개해준 곳이었다. 알려준 방법대로 대학생이고 아르바이트를 안 하고 있다고 했더니 다행히 대출이 승인됐다.

   

그렇게 해서 850만 원이었던 대출은 생활비 150만 원까지 해서 천만 원이 되었고, 세 군데였던 대출 관리 저축은행은 한 곳으로 줄었다. 이율도 전보다 낮은 14.9%로 내려갔다. 하지만 원금과 이자를 갚던 상환 방식에서 이자만 갚는 방식으로 바뀌다 보니 내는 이자만 18만 원이었다. 거기에 취업 후 학자금대출과 일반 학자금으로 인한 원금과 이자까지 하면 한 달에 적어도 33만 원이 빠져나가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고시원비에 대출 이자, 핸드폰비, 교통비, 식비까지 하면 100만 원은 그냥 나갔다. 쥐꼬리만한 월급 받아서 이것저것 내고 나면 겨우 30만 원 남을까 말까였다. 그것도 많아야 그 정도였지 턱없이 부족한 적도 훨씬 많았다.

 

부모님은 대학생 때 용돈을 10만 원 주고 방값을 줬다. 일하기 시작하면서는 그마저도 없었다. 1학년 때는 반찬이라도 보내줬지만 2학년 때는 다 상한다며 돈으로 보내주었고 거의 집에 오지 않았다. 덜컥 빚쟁이가 된 나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빚 갚기에 벅찼다. 아빠가 그나마 근근이 보내주는 용돈에 감사해야 했다. 집에서는 친구들과 노느라 돈이 없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죄다 이자 내고 남은 돈으로 생활을 영위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죽지 못해 사는 이 삶이 가끔 원망스러웠다. 아니 죽고 싶었다. 수도 없이 죽으려 옥상에 올라가 내려다보기를 반복했다. 고시원 방 안에서 매일 울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내 삶은 왜 이렇게 고달픈가, 공부도 못 해보고 생계 때문에 일이나 해야 하다니. 열아홉의 나는 스물세 살에 내가 이러고 살 줄 알았을까. 고등학교 2학년 때 품었던 번역가라는 꿈을 이루고자 부산에 왔는데, 막대한 빚을 지고 생계 때문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어쩔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 해맑았던 소녀는 일본어를 배우려고 왔다가 세상을 혐오하며 돈을 두려워하고 그것에 몸서리치며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았고, 살고 있었다. 그런 인생이 정말 힘들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순간도 너무 힘들다.

    

하지만 스물일곱에 글을 만났고, 빚을 갚으며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 5년 동안 갖고 있던 제3금융권의 대출을 서민금융을 통해 제1금융권으로 옮길 수 있었고, 2018년 1월부터 2020년 3월 초까지 반 정도 갚은 것을 아빠가 미안하게 생각해서 가져갔다. 학자금 갚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이것 때문에 우울증 걸린 것 같다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라고 하면서. 덕분에 지금은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3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으로 글쓰기를 공부해서 교정교열 프리랜서로 신나게 일하고 있다.

   

미래가 보이지 않던 스물아홉만 해도 이런 삶이 펼쳐질 줄 몰랐다. 1년 후 내가 프리랜서가 될 줄 장담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렇게 힘들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죽지 못해 살았지만 이런 인생도 살 만한 것 같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살아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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