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엄마를 찾고 싶어! 그냥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고 그래..'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에게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단칼에 찾지 말라고 했다.
너무 매정하게 말하길래 왜 찾지 말라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더 냉철했다.
부양가족을 늘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남자 친구는 나와 결혼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을 해 준 그 친구에게 너무 고마웠다.
내 나이는 서른을 넘었다. 아직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느 정도는 부모를 부양해야 할 수도 있는 나이이다.
그냥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엄마를 찾고 싶은 이유는 엄마에게 무언가를 받고 싶어서였다.
돈을 받고 싶은 것은 맹세코 아니다.
그냥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싶었다.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끼고 싶었다.
내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사람으로서의 엄마를 갖고 싶었던 적도 솔직히 많았다.
내가 빨지 않으면 절대 깨끗해질 일이 없는 교복이나 실내화에 대해 불만조차 가지지 않았던 학창 시절, 엄마가 다림질을 해 줘서 빳빳한 친구들의 교복을 보면서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따라갈 수 없는 깔끔함에 좌절하기도 했다. 엄마가 빨아준 교복에서는 늘 향긋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엄마라면 자연스럽게 해줬어야 할 일들을 내가 했던 것이지만 이런 생각으로 엄마를 찾고 싶은 생각을 했던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가 엄마를 보살펴야 할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다.
엄마의 보살핌 없이 사느라 다른 사람보다 고단한 삶을 살았고 그 삶은 앞으로도 더 고단했으면 고단했지 크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해 보니 더더욱 엄마를 찾고 싶어 졌다. 혹시라도 엄마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자식의 빈자리를 느끼고 외로워할 수도 있을 엄마의 곁을 지켜주고 싶다.
언젠가 엄마가 먼저 나를 찾아온다면 열과 성을 다해 엄마를 보살피고 싶다.
엄마가 이렇게 나를 보살펴 줬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아요. 하는 마음으로 부양하고 싶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