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 언니 그리고 나. 우리 네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쥐어짜야 겨우 나올 정도.
그중에서도 행복한 이야기는 손에 꼽힐 정도이니 그 몇 가지 기억들을 손에 꼭 쥐고 살아왔다.
이 이야기는 행복하다고 하기엔 어렵고 슬프다고 하기에도 모호한 이야기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풀어보고 싶었다.
나와 세 살 터울인 언니가 중학교에 막 올라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친구들과 놀 때도 혹 같은 나를 잘도 붙이고 다닌 언니였는데 중학교에 입학하더니 나를 쏙 빼놓고 쏘다니는 게 불만스러웠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언니는 친구네 집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 들어 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고 왔다길래 아무도 모르게 혼자 삐쳐있었다. 그 날 늦은 밤부터 언니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구토를 동반한 복통이어서 급체를 한 줄 알고 할머니는 소화제를 먹이고 손을 땄다. 열 손가락을 다 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또 매실 물을 먹이고...
그런데 증세가 심상치 않았다. 언니는 매실 물까지 게워냈다. 우리 가족들은 새벽까지 잠을 못 이뤘다.
체한 언니가 쌤통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미안해졌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나와 달리 잔병치레 하나 없어 어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던 언니가 이토록 아파하던 모습을 처음 봤다. 나도 결국 언니 옆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었었다.
날이 밝으면 병원에 가려고 했던 언니는 결국 새벽녘에 119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새벽의 소란으로 비몽사몽으로 등교했던 나는 언니가 걱정되면서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엄마가 며칠 동안 집에 다니러 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었었다. 참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른이 된 나의 눈으로 11살짜리의 나를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진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할아버지와 함께 언니의 병원으로 향했다. 미리 병원에 와 있던 아빠는 점심을 안 먹은 나에게 빵과 음료수를 사 먹였다. 평소라면 초콜릿 우유를 마셨을 테지만 왠지 그날은 언니가 좋아하는 음료수인 '데미소다 애플 맛'을 먹었다.
할아버지, 아빠 나 이렇게 셋이 수술실 밖 의자에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침묵 속에서 수술실에 들어간 언니를 기다렸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맹장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급하게 수술실에서 보호자를 불렀다. 아빠 혼자 수술실에 들어갔고 할아버지와 나는 그대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수술실 복도에 난 창으로 푸른 하늘과 초록색 나뭇잎들을 보면서 멍하게 앉아 있다 보니 어제의 피로가 몰려왔다. 잠이 들랑 말랑 할 때쯤 아빠가 수술실에서 머리를 정리하면서 나왔다. 평소 아빠의 버릇이었다. 얼굴을 살짝 찡그리면서 머리를 정리하는 모습. 그리고는 곧장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아빠를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천둥이 쳤다. 이상했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푸른 하늘이 보였는데 천둥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도 다 깨고 어리둥절했다.
아빠가 할아버지와 함께 시뻘게진 눈으로 다시 복도 의자로 돌아왔을 때서야 알았다.
그건 아빠의 울음소리였다. 울음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천둥소리였는데... 그때부터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도 덩달아서 눈물이 났다. 아빠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까지 푹 기댄 채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 언니가 죽는구나'
이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도 옆에서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신에게 제발 언니를 살려만 달라고 빌었다. 친구 손에 이끌려서 갔던 여름 성경 학교에서 만났던 하나님에게도, 할머니와 절에 갔다가 어정쩡한 포즈로 절을 했던 부처님에게도. 내가 아는 신은 딱 둘 뿐이지만 무턱대고 빌었다. 왠지 그냥 살려달라고 하면 안 될 것만 같아서 내 목숨에서 5년 정도 드릴 테니까 일단 살려 달라고 빌었다. 수술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5년은 10년이 되고, 10년은 다시 15년이 됐다.
'아.. 20년은 너무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들 때쯤에 언니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핏기 없는 얼굴과 의식 없이 누워있는 언니를 보고는 안도했다. 드라마에서 보면 죽은 사람은 얼굴까지 흰 천이 덮여서 나왔는데 얼굴이 보인다는 건 죽은 건 아니니까... 그런데도 그런 언니의 모습이 왠지 무서웠다. 회복실로 들어가는 언니의 침대에 붙어서 따라 들어가던 가족들과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대로 복도에 앉아 있었다.
그 복도에 앉아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언니가 살아 나와서 다행이지만 사실 내 수명이 짧아졌다는 것에 대한 슬픔도 조금은 있었다는 걸 고백한다. 한 15년은 일찍 죽을 거라는 생각에 암담했다.
그때 갑자기 회복실에서 가족들이 나를 불렀다.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과 함께.
침대에 누워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마취에서 깨어나던 언니는 제일 첫마디로 내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다 못 뜬 눈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어디에 있냐고 찾아서 급하게 나를 회복실로 부른 것이다.
아빠는 언니 손을 잡아주라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언니가 죽는다고 생각해서 너무 무서웠다는 말이나 무사히 살아줘서 다행이라는 말. 또는 언니 내 덕분에 산 거야라는 공치사라든가 많이 아프냐는 말. 하지만 나는 언니 귓가에 대고 가만히 이렇게 속삭였다.
"언니, 나 데미소다 애플 먹었다"
그냥 그게 끝이었다.
언니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갑자기 몰아닥친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히 언니를 위로하고 싶어서 했던 말임에는 틀림없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술실에 들어갔던 아빠 눈 앞에는 장기들이 다 드러난 채로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언니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언니가 그토록 배가 아팠던 건 맹장 때문이 아니라 양쪽 나팔관에 자랐던 혹 때문이었다. 양쪽에 모두 자리한 혹 중에서 커다란 것과 작은 것이 있었는데 그 작은 것이 탈이 난 것 같다고 그걸 제거해도 되겠냐는 동의를 받기 위해 불렀다고 했다. 대신 앞으로 성장, 발육 혹은 임신에도 영향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아빠는 눈 앞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또 끔찍한 이야기를 듣고 나와서 그렇게 천둥소리를 내며 처절하게 울었던 것이다.
언니가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가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고 병문안을 오겠다고 했다. 언니는 포도가 먹고 싶다고 했다. 언니의 말을 들으니까 나도 포도가 먹고 싶었다. 포도를 사서 올 엄마의 모습을 그리며 기분이 좋았다. 비록 병원이지만 우리 네 가족이 모여서 같이 포도를 먹는 상상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언니가 퇴원을 할 때까지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포도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빈 손으로라도 그냥 엄마가 오는 것을 기대했는데 결국 오지 않아서 크게 낙심했었다. 작은 이모 댁 뒷마당에 있던 포도나무가 참 달고 맛있었는데... 그 포도 맛을 떠올리면 괜히 더 슬퍼졌다. 엄마, 언니 나 이렇게 셋이 그 포도를 따서 먹던 기억이 나서.
물론 그 뒤로 포도를 안 먹는 건 아니지만 포도는 왠지 서글픈 과일이다. 중국어를 공부할 때 '포도'가 포도 포(葡)에 포도 도(萄)라는 얘기를 듣고서도 나는 엄마가 사 오지 않은 포도를 떠올렸다. 예능 프로에서 귀여운 아이가 '포도 먹고 싶은 사람~'이라는 아빠의 질문에 '네~'하고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 날 엄마가 사 오지 않은 포도를 떠올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 날 엄마가 사 오지 않은 포도가 마음속에 얹혀 있을 줄 알았다면 엄마에게 포도를 사 오라고 하는 언니의 수화기를 빼앗아서 빈손으로라도 그냥 꼭 와달라고, 나는 보지 않아도 좋으니까 언니의 배에 길게 남은 흉터를 보고 슬퍼하고 위로해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라도 할 것을 그랬다.
아빠의 천둥소리와 엄마가 사 오지 않은 포도, 언니가 좋아하던 데미소다 애플, 그리고 15년의 수명이 꺾인 열한 살의 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 네 가족이 한 데 버무려진 하나의 소중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