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때가 아닐 뿐
축적의 시간이 먼저다
"묵묵히 본연의 일을 해나가다가, 우연의 미학이 발휘되면 감동이 있는 거죠. 퇴로를 열어두고 하는 일과 전부를 거는 일은, 그 파장이 달라요. 떼돈을 벌기 위해 막차 탄 유튜브는, 소통의 과정을 즐기는 유튜브를 이길 수 없어요. 그래서 축적의 시간이 먼저죠."
수년간 빅데이터의 시대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21세기 K-현인 중 한 명인 송길영 인터뷰의 일부다.
개인적으로는 매스마켓의(Mass Media, Mass Brand) 종말, 더 쪼개지고, 더 세분화되고, 더 깊어지는 시대의 '기회'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설명한 워딩으로 생각된다. 소위 역사 속 절대 권력의 허무함을 표현한 '화무십일홍'과는 전혀 다른 Micro Social Network의 시대다.
‘취향의 존중', '진정성에 대한 존중', '결과 보다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을 줄 아는 성숙함, ' '잠시는 속일 수 있어도, 모두를 속일 수는 없는 투명함, ' 소위 음지에서 '빛 못 보던 것'들이 빛날 수 있는 시대에 우리 모두 진입해 있다. 최근 내 일상 속에서 눈에 띈 트렌드 세터들을 짧게 소개해 본다.
5수생의 미쳐버린 대학 생활
유쾌한 5수생 얘기부터 시작해 보자.
2000대 생들에게 가장 핫한 유튜버 중 하나인 미미미누, 그는 세상에서 가장 핫한 5수생이다. 재수하여 홍익대에 합격 후 3수를 하여 동국대 합격, 4수에 한양대학교, 군 전역 후 5수를 하여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 4차 추가합격자로 소위 문 닫고 들어간 케이스다.
명문대라고는 하나 의대나 약대가 아닌 문과를 무려 5수를 해서 입학한 그는 4년간의 기나긴 수험생활을 재료로 유튜브 활동을 시작했다.
이 5수생 유튜버의 진화는 실로 놀랍다. 수험생활의 잔잔한 소재(혼코노, 인강, 인강 강사 등) 패러디로 인기를 얻은 그는 메가스터디의 인기 강사인 유대종의 강의에 초대되고, 급기야 메가스터디와 합작영상을 제작하게 된다. 이후 경쟁업체인 비상교육, 한솔 교육 등과 '미미미생'이라는 콘텐츠 제작으로 이어지고 '대치동, 목동 길거리 수학 문제 챌린지', '유쾌한 정시상담', '현대 자동차 신입면접, ' 등 어쩌면 늘 우리 주변에 있었지만 조금은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졌던 담론들을 한 편의 리얼리티 코미디쇼처럼 경쾌하게 풀어낸다.
댓글에는 '미미미누 5수가 신의 한 수', '현역으로 고대 안 간 것이 대박', '5수 안 했으면 잘해야 현대차 입사했을 텐데, 현대차와 광고라니...', '이런 콘텐츠 계속 만들어주세요.'등의 피드백이 가득하다.
실제 재수, 3수, 4수... 수험생활은 어느 단면으로 잘라서 봐도 정말 우울하다.
가장 젊고 빛나는 시기에 잡담금지, 연애금지, 모의고사 성적에 착각금지 등 조금 더 나은 학벌을 위해 모든 본능을 꾹꾹 눌러야 하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인 시간. 그 우리 모두의 기억 속 우울하지만 소소한 일상들은 최소 수백만 명이 공감할 수 있는 인포테인먼트 콘텐츠로 변신시켜 공감과 감동을 주고 있다.
5수생 미미미누의 힘은 무엇일까?
"휴학을 할지언정 결방은 없다." 그는 주 5회 생방송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4년 넘게 일단 양적으로 풍부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어느 매체에서도 정기적으로 다뤄 주고 있지 않는 10대들의 최대 관심사를 일 년 내내 다뤄 주고 있다. 무엇보다 재수 삼수가 아닌 5수생활에서 우러나는 진한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초등시절 코미디언을 꿈꾸었던 그의 천성이 더해졌다. 송길영이 말한 세분화되는 시장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묵묵히 즐기며 꾸준히 축적하는 과정에서 미학이 발휘되고 감동을 준 것이다. 그야말로 부업이 주업되고 그 축적의 과정속에서 70만 유튜버가 된 셈이다. Web 3.0의 시대에 최근 들어 가장 눈에 띈 친구 중에 하나다.
언더독의 발칙한 추월
두 번째 장면은 영원한 언더독 김어준의 유쾌한 반란이다.
김어준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국내 최초 인터넷 언론사 딴지 일보의 창립자이자 총수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으나, 언론인, 작가, 유튜버, 영화감독, DJ 등 다양한 경로로 영향력을 파는 종합 예술형(?) 셀럽 언론인이다. 논란의 중심에 늘 서있는 진보 언론 셀럽인 그를 추앙한다기보다는 변화된 매체 트렌드를 가장 잘 가지고 논 그의 사건을 하나 짚고 싶다.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인 그는 2016년부터 TBS라디오에서 김어준의 뉴스 공장이라는 아침 뉴스쇼로 라디오 방송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해당 방송은 5년간 동시간대 청취율 1위는 물론, 22년 4분기 13.1%라는 청취율로 국내 예능, 음악, 시사, 교양 등 전체 라디오 프로그램 중 청취율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서울시와 TBS 간 첨예한 예산 문제로 22년 12말로 해당 방송은 종영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모난 돌이 정 맞는 식으로 갑자기 사라진 각 방송사들의 시사프로그램 들은 종종 있었다.
세계 1위로 돌아온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연말을 기점으로 사라질 줄 알았던 김어준은, 해를 넘기자마자 동일한 세트의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뉴스공장의 스텝과 작가와 패널들을 그대로 옮겨 새로운 유튜브 기반 IP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첫날 구독자 50만, 동시 접속자 18만 5천 명, 조회수 200만. 방송 닷새만에 구독자 100만, 론칭 이후 평균 동접자 21만 명, 누적 슈퍼챗 2억천만 원으로 전 세계 슈퍼챗 1위를 달성했다.
결국 축적의 힘.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한국 방송사 어쩌면 전 세계 방송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지상파(주류매체)를 떠난 비주류 언론인이 불과 수개월의 준비로 모든 지상파 매체를 다 모은 것보다 더 많은 영향력의 채널로 센세이션 하게 재탄생한 케이스는 없었다.
김어준은 이미 오래전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 TBS라디오를 뛰어넘은 울트라 크리에이터이자 인플루언서였을 것이다. 1998년 맨땅에 설립한 딴지일보, 2004년 CBS 저공비행, 2009년 한겨레 TV 김어준의 뉴욕타임즈, 2011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나는 꼼수다, 2014년 김어준의 파파이스, 2016년 뉴스공장, 17년 딴지라디오 다스뵈이다, 18년 SBS 블랙하우스, 21년 월말 김어준으로 쉼 없이 언더독 시사 콘텐츠를 생산해 오며 핵분화하는 레거시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꽉꽉 채워왔다.
최근 20년 동안 김어준보다 더 많은 양의 정치 콘텐츠를 생산한 크리에이터가 있을까?
정치성향, 욕과 털, 휴고보스 양복과 옴 진리교 교주와 같은 헤어스타일 등 눈에 보이는 요소들을 제거한 그의 본질적인 시간을 복기해 보면 미미미누와 같은 지점들이 짚힌다. B급 인터넷 언론사라는 본인이 좋아하는 직업을 만들어서, 누가 보든 안보든 매일매일 콘텐츠를 생산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그 B급도 콘텐츠도 빛을 볼 수 있는 시대와 닿고, 디지털 매체환경에서 터지고, 정치적인 악재가 오히려 그를 따르는 팬덤에게 더 진한 감동을 주며 더 이상 B급이라고 부를 수 없는 World Class Creator로 진화했다.
첫 단추를 100만 구독자, 일 평균 21만 동접자, 4천만 원의 슈퍼챗으로 잘 끼운 '겸손은 어렵다'는 새로운 축적의 시간을 통해 새로운 미학으로 두 시간짜리 뉴스쇼가 아닌 코난오브라인언 처럼 플랫폼의 진화화 함께 진화하는 신개념 콘텐츠 유니버스이자 멀티버스로 진화할 가능성에 기대감을 갖게한다.
팔씨름하면 뭐가 나오냐?
세 번째 장면은 '팔씨름에 미친 사람들' JTBC '오버더톱'이다.
올림픽 종목도 아니고, 프로 스포츠도 아닌 팔씨름은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들에게도 다소 낯선 종목이다. 국가 대표급으로 소개되는 주민경, 지현민, 김도훈, 현승민, 홍지승 등의 소위 그들 세계에서의 스타플레이어들 조차 이름도 생소하다. 물론 홍지승 선수는 이따금씩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보게 되어 작은 체구에 거구의 외국 선수들을 이기는 선수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팔씨름을 보다가 울었다.
"저는 너무 어렸을 때부터 팔씨름이 좋았어요. 사람들이랑 손잡을 수 있어서 좋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고, 제가 팔씨름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손가락질하고, 팔씨름하면 뭐가 나오냐고.... 팔씨름 선수라고 하면 그게 뭐냐고 그러고..." - 오버 더 톱 초대 우승자 주인경 선수
"저는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10년 가까이 훈련을 해와서... 눈 감으면 팔씨름 생각만 나고, 몇 년 동안 한 번도 훈련을 꾸준히 안 한 적이 없었고, 노력이 척도 라고하면 제가 이깁니다." - 오버 더 톱 준우승자 지현민 선수
어.우.지.'어차피 우승은 지현민'으로 불린 팔씨름 통합 1위 지현민(99년생)
지현민선수보다 10살 형인 주인경(89년생)은 지현민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예선전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자신의 '목표'였던 선수를 결승에서 3:0으로 꺾는 이변을 만든다.
예선전부터 16강전까지는 야구선수, 격투기 선수, 강철부대, 비보이, 개그맨, 연기자 등 여러 영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강한 남자들이 팔씨름이 주종목인 선수들에게 그야말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16강전부터는 매 경기 숨막히는 드라마.
팔씨름에서만 필요한 손목의 작은 근육들을 수년간 수련으로 끊임없이 키우고, 부상의 위험을 달래 가며, 생업을 병행하며, 본인이 좋아하는 팔씨름에 미친 사람들.
1회 시청률 2.18% 동시간대 종편 시청률 1위로 시작하여, 마지막 11회 2.37%로 마무리하게 된다. 유튜브가 없었더라면 몰랐을 팔씨름의 세계. JTBC의 기획이 없었더라면 몰랐을 선수들의 인생 드라마. 그 어떤 스포츠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인생을 걸고 자신이 좋아하는 팔씨름을 위해 도장을 차리고, 훈련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21c형 범 오타쿠의 시대는 실로 범위와 경계가 없음을 또 한 번 일깨워 준다.
지현민이 팔씨름에 처음으로 빠졌던 중학교 시절 오버더톱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저 팔씨름이 좋았던 소년은 그 좋아하는 팔씨름 훈련을 수년간 묵묵히 해오며 대한민국 통합 1위가 되고, 그 1위를 꺾겠다는 목표로 5년간 수련한 주인경은 오버더톱의 결승에서 그 큰 산을 넘어선다. 나이도 스펙도 과거의 인지도와 상관없이 오늘 누가 더 강한 악력과 팔뚝을 만들었는가로 새로운 서열이 정해지는 세계.
Really respect all of over the top members.
어떤 선택을 하던
그 길의 끝에 우리 각자가 원하는 각자의 '그것'이 있다면 묵묵한 시간이, 그 축적의 과정이 그대들을 자유케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