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제 좀 더 편해지자
변화는 나의 힘
“와, 가죽점퍼 잘 어울리시네요?"
"요즘 이렇게 입고 다녀. 편하게."
아직 지하철 시간 예측이 서툴러서 20분 정도 늦게 후배들과의 저녁 약속에 도착했다.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가지 않은 지 2주가 조금 넘었는데, 벌써 몇 달이 지난 느낌이다. 반갑고, 어색하고 어떤 얘기로 분위기를 풀어갈지 잠시 고민했다.
'여행 다녀오고, 20년 만에 이력서도 쓰고, 생에 처음으로 헤드 헌터도 만나고, 브런치 작가도 되고... 정말 잘 살고 있다고 얘기를 해야 하나?', '백수 생활이 너무 좋다고 하면, 뭔가 인위적으로 애쓰는 느낌이 나지 않을까?' '얘들은 또 어떤 생각들로 오늘 여기를 나왔지?'... 나름 동네 유명 맛집인 이촌동 중식당의 안주들이 순서대로 나오고, 고량주와 맥주가 들쭉날쭉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내가 인사권자였던 터 호칭도 왔다 갔다 하고, 오늘 자리가 회사를 떠나게 된 선배를 배려하는 콘셉트이다 보니 다소 조심스러운 탐색전이 불가피했다.
내려 놓음, 편함, 그리고 솔직할 용기
일단은 조용히 듣기로했다. 먼저 나온 팔보채와 가지 튀김 등 음식에 대한 품평이 있었고, 최근 회사 생활 에피소드들이 몇 개 나오고, 조선의 술자리답게 없는 사람들 얘기도 하게 되었다. '그래, 오늘 이 친구들이 날 위해 이 멀리까지 무리해서 와준 거였지. 그리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간의 뭔지 모를 강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간을 보내고, 내가 떠난 그 회사에 연연치 않고 완전히 내려놓고 살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술자리가 조금 더 무르익어가며, 문득 오늘 자리가 이전과 달리 고등학교 동창회처럼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제 이 친구들의 고과를 평가할 일도, 이 친구들과 함께 머리싸맬 민감한 이슈도 없고, 누구를 더 이뻐한다는 오해를 받을 일도 없구나.' 사람들에 대한 권한이 없어졌다는 것이 꼭 서글픈 것이 아나라 사람들을 마음 가는 대로 대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함께 일하며 스킨십이 거의 없었던 녀석과는 어깨를 툭툭 치며 다소 과장된 호감을 표현을 할 수 있었고, 나와 17살 차이나는 그 자리 막내와는 한 번도 표현해 본 적 없는 '보고 싶었다'는 커밍아웃을(?)하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때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굳이 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상처 주는 말들을 했던 친구들에게는 한 명, 한 명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쑥스러워서 사족을 달지 않고는 쉽게 하지 못했던 낯 간지러운 칭찬도 해보고, 지난 시간에 대한 내 변명들도 꾸밈없이 해보았다. 참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허심탄회함이다.
고량주, 맥주, 봄베이 사파이어, 준벅, 예거밤... 처음 먹어보는 술까지 여러 잔이 쉼 없이 지나갔다. 코로나 이후 이렇게 과음하는 술자리가 얼마만인지. 인덕원이 집인 한 녀석은 잠이 들어 안산까지 갔다는 카톡이 왔다. '그래 이 분위기면 더 멀리도 갈만하지.'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난다.
퇴직 후 후배들과 첫 만남은 그렇게 수많은 허그와 취중진담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좀 더 편해지자.'
'나 오늘 가죽점퍼도 사실은 신경 써서 입고 나온 거란 말이야.'
'각자 다른 길을 걸으며 더 이상 높고 낮음 없이, 우열 없이, 사심 없이, 선배니까 여전히 뭔가 도움이 돼야 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완전히 새롭게 가자.'
'보란 듯이 더 잘 나가지 못하더라도 서로 실망하기도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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