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날덕 Feb 19. 2024

9. 챈들러 김렛

챈들러 방식 -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우선은 책상 하나를 딱 정하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글을 쓰기에 적합한 책상 하나를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원고지며 만년필, 자료 등을 갖춰놓는다. 반듯하게 정리할 필요까진 없지만 언제든 일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매일 일정 시간 - 예를 들어 두 시간이면 두 시간 - 그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내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무라카미 씨. 


사실 이 글들은 말씀해 주신 챈들러 방식에 의거해서 작성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하루 일을 마무리하고 책상 앞에 앉아 랩탑을 엽니다. 랩탑은 맥북 프로 M1 14인치인데 회사에서 일하라고 준 겁니다. IT 업계에서 일한 지 벌써 12년 차입니다만 제 돈 주고 컴퓨터를 사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컴퓨터는 어디까지나 일하는 도구일 뿐이니까요. 아마 제 머릿속에는 '컴퓨터=일'이라는 공식이 알게 모르게 강하게 각인되어 버린 게 아닐까요. 그래서 컴퓨터를 산다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회사로 인한 알레르기라니 산재가 틀림없습니다. 물론 취직 이후 현재까지 늘어난 15kg의 몸무게도 마찬가지구요. 당장이라도 머리에 띠를 두르고 투쟁을 외쳐야 마땅하겠습니다만, 날이 너무 추우니 그냥 회사 랩탑을 살짜쿵 유용하는 정도로 쇼부를 칠까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챈들러 방식은 한국에서는 유구한 전통과 명맥을 자랑하는 방법입니다. 예로부터 선조들께선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다란 말씀을 늘 하셨죠. 챈들러 씨가 이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셨다니, 아무래도 주변에 한국에서 고시 공부를 경험한 분이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철학과 대학원생이 있었을지도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같은 책은 정말 엉덩이로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칠 줄 모르는 끈기와 강인한 의지가 아니고서야 감히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럴 때 바로 챈들러 방식이 빛을 발하겠죠. 딱 그 책 한 권만 들고 스스로를 독방에 가두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겨워서라도 책을 읽게 되지 않겠습니까.


<존재와 시간> 하니 대학 때 해석학을 가르치시던 김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그분 전공이 존재론이셨고, 논문 관련해서 하이데거를 여러 번 읽으셔야 했다고 하셨었죠. 그렇게 읽다 읽다 읽다 이게 무슨 소린지 열받아 피우던 담배로 <존재와 시간>을 지지신 것이 수차례, 책이 곰보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상당히 새디스틱한 일화 같네요. 피로에 찌들어 빨갛게 충혈된 눈에 한 쪽 입꼬리만 올라간 채로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책을 담뱃불로 지지는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니,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분명히 이건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제게 해석학 A+을 주신 인자하신 선생님께서 그러실 리가요. 암요.


다시 챈들러로 돌아와서.


챈들러 방식 글쓰기도 좋습니다만 제가 더 좋아하는 건 바로 챈들러 김렛입니다. 그의 소설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에서 바로 이 김렛의 제조법이 나옵니다. 


여기 사람들은 김릿 만드는 법을 잘 모릅니다. <중략> 진짜 김릿은 진 반, 로즈 사의 라임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는 거죠. 마티니 같은 것은 비교도 안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멘트를 주인공이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인공 필립 말로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테리 레녹스가 한 말이죠. 하지만 어째선지 사람들의 뇌리에는 이 김렛이 강하게 남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이 챈들러 김렛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잘못 기억하곤 합니다. 주인공인 필립 말로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삐딱한 안티히어로 스타일로, 중절모에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권총을 찔러 넣은 채로 카멜을 연달아 뻑뻑 피우는 탐정 캐릭터입니다. 이런 아메리칸 마초에게는 역시 버번이죠. 챈들러의 여러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포 로지즈(Four Roses)라거나 올드 포레스터(Old Forester) 같은 버번을 마시곤 합니다. 



챈들러 김렛은 대체로 요렇게 나옵니다. 예쁜 마티니 글라스에 내기에는 좀 터프한 편이거든요. 출처: https://americanpulps.com/drink-like-a-ch


하지만 저는 아메리칸 마초가 아닌지라, 이 챈들러 김렛을 엄청 좋아합니다. 그래서 바에 세 번 정도 가면 한 번은 꼭 주문하는 칵테일이죠. 다만 문제는 이 챈들러 김렛이 의외로 유명하지 않은 칵테일 레시피인지라, 무슨 김렛이요? 라고 되묻는 경우도 종종 왕왕 있다는 겁니다. 작년 대만 여행의 카발란 위스키 바가 딱 그랬습니다. 챈들러 김렛이라니 그게 뭐야?라고 묻길래 각얼음에 라임 주스 반 진 반 넣고 대충 저어 주면 된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진짜 있는 레시피냐고 묻길래, 진짜 있는 게 맞다, 구글에 검색해 봐라 했었습니다. 옆자리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같이 찾아보더군요. "한국에서 유명한 거냐?"고 묻길래 "음 이건 미국에서 더 유명할걸"이라고 대답해 줬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유명한 칵테일 레시피가 있는데, 러스티 네일에 생제르맹을 적당히 탄 거야. 제대로 타면 올드 패션드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지."라고 레시피도 알려줬죠. 


아, 러스티 네일에 생제르맹을 탄 칵테일 이름이 뭐냐구요? 김정민이라고 합니다. 바텐더 여러분 꼭 기억해 주세요. 김정민입니다 후후.




매거진의 이전글 8. 유명인과 같은 이름은 불편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