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네가 내 엄마였을 거야."
"이건 입어도 될 것 같은데요. 애아빠 입겠다고 하면 가져갈게요."
이상하다 내 엄마가 돌아가신 친할머니옷을 물려 입더니 부부가 쌍으로 아버님옷을 입겠다고 한다.
어머니는 보기 힘들다며 다 치우란다.
"2024년 1월 10일 9시 52분 소천하셨습니다..."
모두 일시정지되었다.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이 멈춰버렸다.
남편은 한순간에 할 일이 없어졌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
'두 분이 돌아가시면 난 어떻게 살지?' 말도 안 되는 그 소릴 내가 했었다.
이제 이어받아서 내 말, 그 의미를 알게 된 남편.
서럽게 울었던 남편. 그 뒤에 들썩이는 어깨를 지켜보는 나.
삼우제를 지내고 49제 초제가 지났다.
그때부터였나.
잠만 자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게.
실컷 울었으니 이젠 그만 울자 마음먹으면 멈출 줄 알았다.
설마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우는 며느리가 있을까? 했다.
불쑥 나오는 아버님 이야기에 울고 혼자 있을 때도 기억 하나씩 끄집어낼 때마다 이렇게 울게 될 줄 몰랐다.
미워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불쌍해서..... 그리고 따지고 묻고 싶은데 어디에서도 물을 수 없어서 울고......
너무나 안타까웠던 아버님을 이젠 볼 수 없다.
이젠 나에게 화를 내지도 노려보지도 소리치지도 않을 것이고
불평도 안 할 것이고,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지도 않을 것이고................
이제 아버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그렇게 듣고 싶었던 미안하단 말 한마디 안 남기고 가셨다.
남편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아버님이 가시는 날은 어떨까?
미안하다 하시면 나는 내 답을 준비해야지.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폈었다.
그런데 숨을 몰아 쉬고 있을 때, 맥이 잘 안 잡힐 때, 눈을 뜨지 않으실 때,
제발 살아만 계시라고 뭐라 한 말씀만 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장남 내외만 울보가 되었다.
난 아버님께만은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원 없이 잘해드렸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미련 없이 다리 뻗고 잠들 줄 알았다.
'자기 어서 먼저 가서 편안히 있어. 아쉬울게 뭐가 있어. 자식 다 잘 키웠겠다. 손주들 그득하겠다. 미련 없이 어서 가.' 어머니의 말씀이 야속한 듯 아버님은 살고 싶으셔서 안간힘을 쓰시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숨을 몰아쉬고 계셨다.
이어령선생님의 '눈물 한 방울'에서 그러셨다.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밤마다 찾아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나 두렵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아버님도 그런 것 같았다.
좀 더 살고 싶다고
콧줄 말고 제대로 밥 한 번만 먹게 해 달라고 시원하게 물 한 모금 마시고 싶다고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가느다란 숨소리에 한마디 한마디를 실어 보내는 것 같았다.
죽음은 실제와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랐다.
아버님의 맥은 어쩌다 뛰었고 혈압도 간혹 올랐내렸다 반복.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은 차갑게 식어있었지만, 손을 주물렀다.
착각인지 몰랐지만 혈색이 도는 것 같았다. 쭉 피고 있던 손가락이 굽혀져 내 손을 잡는 것 같았다.
의사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아직은 아닌 것 같다고..... 시계추처럼 몇 번을 왔다 갔다.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반복된 의식 같았다.
내가 곁에서 계속 주물러 드렸다면?
계속 힘내라는 이야기를 해드렸다면?
그때 그 목소리로 "아버님! 으쌰 으쌰 파이팅!"
했더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했더라면 했더라면 했더라면.
가시 고나니 덮고 있던 기억들이 올라온다.
매번 역사와 시사를 테스트하시던 아버님의 돌발퀴즈.
매번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시던 아버님의 선 넘는 심부름들.
극기훈련 같았던 나날들.
그리고 아들에 대한 험담.....
그 구겨진 신문지 같은 험담은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다는 걸 알았다.
아버님의 무리한 심부름이 내 잔근육을 키워줬다는 것도 알았다.
아버님의 병은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내게 자유라는 선물을 주었다는 어이없는 결과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잃어버린 젊은 시간을 돌려받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한마디만 하시면 좋겠다 싶었다.
왜 간혹 정신이 돌아왔을 때 단 한 번도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셨는지.
나는 또 유치하게 왜 그 말을 그렇게나 듣고 싶었는지.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그 말을 내가 하고 있다.
'아버님, 끝까지 제 손으로 보살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할 만큼 했으니 난 떳떳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 말을 내뱉을 줄 꿈에도 몰랐다.
"전생에 너는 내 엄마였을 거야..."
"네?"
치매이셔도 간혹 정신이 돌아오실 때가 있었다.
실수하신 옷을 벗기고 씻겨드리는데 간혹 이런 말씀을 하시니 한숨부터 나오곤 했다.
'참... 아버님도 어떻게든 엮어서 날 묶어놓으시려나 보네.'
그땐, 너무 얄미웠다. 그 말을 안 하시면 좋으련만.
얼굴에 가면을 썼다. 겉으론 웃었다. 매번. 아버님을 웃게 해 드리기 위해서만 나는 존재했다.
그런데
그 말인 걸 몰랐다.
엄마 같아서 모든 걸 맡겼다는 걸
아무런 부끄럼도 못 느낄 정도로 편해서
엄마 같아서
투정도, 성질도, 잘난 척도.... 그 모든 걸.........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봤다는 걸
너는 전생에 내 엄마였기에 내가 뭐라 해도 넌 언제나 웃을 거라는 걸.
그래서 '엄마였다'는 그 변명이............ 그 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
미. 안. 하. 다. 였다는 걸. 이제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