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유연함이 주는 영역의 확장성
'OO야.. 난 그 인간,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그 인간은 어떻게 자기 생각대로만 그렇게 밀어붙일 수가 있지? 정말 짜증나는게 뭔지 알아? 다른 주변 사람들이 내 말은 안 듣고, 우리 조직내에서 그 인간이 힘이 있다고 그 인간 말만 듣는다는 거야.
분명, 내 말이 틀린 것이 없는데, 아마 사람들 속으로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윗사람이라 그 인간에 동조하는 것일꺼야... 요즘 되는 것도 없고, 사는 게 짜증 나고 힘들다.'
'원래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인마~'
누구나 가족이나 동료,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의견의 충돌로 힘든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 당시, 나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괴로웠고, 괴로움은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음해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였으며, 그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의 입장에서는 내 의견이 옳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진실은 나 자신을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또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규정하였으며, 친구가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에게 동조하도록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주변 모든 상황들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적'으로 인식된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때는 모든 것을 오직 '나의 중심으로만' 생각하던 시절이었기에 다른 시각에 대해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그 당시 난 '나의 중심으로만'이 아닌 '나의 중심'으로 세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어야 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은 '나의 중심'과 '세상의 중심'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나의 중심'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가장 중요하고 나의 행복을 위해 세상이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반면, '세상의 중심'은 난 그저 세상의 일부분이고 특별하지도 않다. 그래서 큰 스트레스 없이 남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좀 더 배려하고 헤아리며,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지만, 실속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은 '나의 중심'이던, '세상의 중심'이던 상관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내가 중심이 될 수 있고, 세상이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시선을 선택할 수 있다. 그저 선택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편협한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나와 다른 시선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식도 상관없다.
그동안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고 싶었기 때문에 삶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하며, 이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이 선이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에게 '선'은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남을 '악'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유연함이었다.
우유부단한 것이 싫어서 명확한 나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편협한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빠져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중심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명확'하고 '분명함'이라는 편의성과 논리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해의 영역은 점점 줄었던 것이다.
난 앞으로도 삶의 기준을 세우고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유연함을 갖춘 '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방식은 기준의 다양성을 만들어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을 나로 만드는 방식일 것이다.
아마 내 친구가 '사는 게 다 그런 거야.'라고 했던 것은 '나의 중심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의 중심'으로 다양함을 인정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원래 사람들의 생각이 틀린게 없어, 그냥 다를 뿐이지.'
'사는 게 다 그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