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계속되는 무더운 여름, 자연스럽게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생각난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잠시 생각에 잠기면 그 사이에 컵 표면에 들러붙은 작은 물방울들이 보인다
'너도 땀을 흘리는구나'
허탈한 농담과 함께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면 몸 안의 뜨거운 열기 대신 찬 기운이 뱃속을 중심으로 서서히 퍼진다. 더위로 인해 빠져나간 나의 기운이 보충되는 느낌이다. '속이 찬 기운이라 웬만하면 찬 음식을 드시지 마시고 따뜻한 물을 드시는 게 좋습니다.'라는 예전에 한의사 분이 한 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내 몸은 당장 찬 기운 원하니 지금은 그런 말이 아무 의미 없다.
카페마다, 브랜드마다 약간씩 커피 맛을 다른데, 10년 전 카페가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믹스커피의 맛이 우리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우숩게도 그 시절 커피 맛은 믹스커피의 커다란 알갱이 한 가지 맛만 있는 줄 알았다.
이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시원함과 함께 약간의 신맛과 쓴맛이 찾아오고 끝에 약간 탄맛이 남는다. 예전에는 다 쓴맛같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그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 내가 숨겨진 음식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는 셰프가 된 것 같다.
나중에 퇴직하고 내가 상상했던 모습
직장 일이 익숙해지고 지루해질 무렵, 문득 다른 일을 생각해 보았다. 심각한 고민보다는 내가 다른 일을 하면 어땠을까라는 정도의 고민이다. 지금의 직장은 사실 나의 MBTI 성향과 맞지 않는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나의 겉보기 성향만 바뀌었을뿐 사실 다른 성향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막상 다른 분야의 일을 할 용기도 없기에 마음에는 늘 다른 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남아있다. 그래서 익숙함이 참 무섭다.
10년 전 그 당시 바리스타라는 직업이 멋져 보였다. 깔끔한 셔츠에 어깨 끈으로 연결된 앞치마를 입고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프로페셔널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카페를 구상했고, 둥근 나무 테이블에 푹신한 의자와 낮은 테이블에 넓은 소파 같은 의자들을 배치하고 길게 늘어진 은은한 둥근 조명과 기둥에는 과하지 않은 잘잘한 소품들을 꾸민 그런 카페를 차리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띠링~' 출입문 종소리가 들리면, 앞서 언급한 옷차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멋있게 내리고 손님이 없을 때는 카페 한쪽 구석에 앉아 노트북에 글을 쓰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히죽히죽 웃곤 하였다.
어느 날 이러한 꿈을 아내에게 이야기 했더니
"하.. 생각해 봐.. 공유같이 잘 생긴 사람이 해야 멋있지 너처럼 키도 땅딸만 해서 못생긴 네가 하면 안 어울려.. 그리고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카페 구석에 혼자 앉아 죽치고 앉아 있으면 젊은 얘들이 오겠니? 아마 하루 종일 손님이 없어서 혼자 앉아 있을 거다. 카페를 아무나 하냐? 그리고 너의 역마살 같은 성격도 카페랑 안 어울려.. 관리 어떻게 할래?"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었다.
바리스타 교육을 신청하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당시에 사회적으로 커피의 관심도가 높아진 만큼, 한 은행에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달간 바리스타 교육을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날 5만원을 은행에 입금하고 조합원이 되어 바로 교육을 신청하였다.
첫날, 생각 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나처럼 어떤 목적보다는 분위기상 가볍게 온 느낌이었다. 교육내용은 커피콩의 종류부터 볶는 법, 갈려진 커피 콩에 물 내리며 커피를 추출하는 법, 향을 맡는 법 등 실습 중심의 교육이었고 이때 배운 몇몇 내용들은 지금까지도 잘 써먹고 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바리스타 시험을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나요?"
어설프게 손을 살짝 들었더니, 지금 하는 교육으로는 시험 준비로 부족하고 많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한다. 대충 들어보니, 시험을 보기 위해 외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내가 참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뜩이나 영어를 잘 못하는 나에게 이름 생소한 용어들은 귀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실습 중심이라 용어를 익히지도 못한 채 그냥 바로 시키대로 따라 할 뿐이었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꿈에 대한 매력이 훅~ 떨어졌다. 아마 바리스타를 향한 꿈이 절실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바리스타 시험을 보기 위한 관점으로 접근하니 내가 직접 내린 커피들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다지 맛나지 않았고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내 길이 아니구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 남기로 했다.
빠르게 바리스타의 꿈을 접고 현재 교육을 즐기기로 하였다. 비록 다음날 배운 용어들은 다 까먹었지만 꽤나 흥미 있는 시간이었다.
'난 소비자로 남아야겠다.'
생산자보다는 소비자가 훨씬 행복한 것 같다. 퇴직 후의 꿈은 카페 주인이 아니더라도 커피를 시켜 놓고 1~2시간 노트북으로 글 쓰는 것만으로도 카페 운영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니 오히려 더 즐거울 것 같다. 전기료, 임대료, 인건비, 재료비, 관리비 등 어설프게 차렸다가는 퇴직금 날리기 딱이다.
비유하자면, 차를 구입해서 10년 동안 끌고 다닌다고 가정하면, 차량 구입비 몇 천만 원에, 기름값, 보험료 등이 기본적으로 나가고 주차에 신경 쓰고 사고라도 나면 머리 아프니, 차라리 그 돈으로 버스나 택시 타고 다니는 것이 결국 비슷한 비용 같다. 물론 덜 자유롭겠지만...
카페도 내가 생산자가 되기보다는 소비자로 남는 게 왠지 기회비용이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소비자로 남기로 하였다(최소한 망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다른 꿈을 꾼다.
나는 일하기가 싫다. 세상에 일하기가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소일 삼아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생존을 위해 일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고 자부한다. 젊은 시절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남들보다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인지 나이들어가는 시간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싶어서, 퇴직 후 자유롭고 싶어서, 연금 복권과 로또를 산다. 10년째 사고 있다.
복권만 당첨된다면, 퇴직 이전이라도 딱 10년만 더 일하고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 지금은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하기에 수필 작가나 여행 작가를 꿈꾼다. 덤으로 여행 유튜버로서의 삶도 꿈꾼다.
"너 그렇게 싸돌아 돌아다니다 몸 다 버린다. 나이를 생각해.. 나이를.."
라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하겠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꿈은 변할 수 있겠지만, 무엇인가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하고 싶은 있어야 움직이고 움직여야 삶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지금하고 있는 글쓰기와 헬스, 영어 공부 등은 미래의 꿈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꿈이 있으니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 꿈을 이룰지 못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