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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Aug 19. 2017

끝까지 해볼랍니다

<소설 Lara>를 쓰면서

매일 글을 쓰는 것은 이제 물러설 수 없는 이동영의 꿈이자, 변함없을 트레이드 마크이다. 돈이 안 되면 인간에게 모두 무가치, 무쓸모, 무의미한 노동일 뿐인 걸까?


얼마 전부터 인스타에 소설 연재를 시작했다. 함께 사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보는 인간의 자본주의적 혹은 물질주의적 무기력함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소설 Lara>이다.


함께 사는 고양이 다행이는 '라라'라는(라틴어로 '보호'를 뜻하는)수호신의 영혼을 입게 된다. 자소서를 쓰며 한숨 쉬던 가난한 작가(집사)가 곁에서 보기에 참으로 딱 해서. 자신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자신과 놀아주는(인간 사회에서는 무가치한 노동을 하는)작가(집사)에게, 보상 내지는 은혜를 최소한 갚겠다는 도의적인 차원에서 다행이가 수호신 Lara를 직접 호출한 것이다.


라라는 다행이(고양이)의 모습을 한 채 '조건을 듣는다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 실제 그 고양이가 인간에게 돈을 줄 수 있을까? 결국 '집사' 인간이 모든 걸 다 하게 된다. 진짜 가치, 쓸모, 의미는 살아있는 존재 자체로부터 시작한다는 것, 그 희망이라는 것.

또한 인간에게 기쁨이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며, 가난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기준에 인간의 본성과 정신을 놓고서 그걸 좇으며 욕망으로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야기이다.


진정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하고픈 열정으로 산다면 보상으로 주어지는 물질은 비록 남과의 비교우위에 없더라도 개인의 우주 안에서 행복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소위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나 '공부 못하면 저렇게(?)된다는 식(예를 들면 추울 때 찬데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데서 일한다)'의 사람이 뒷전인 요상한 논리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왜? 고양이는 원래 그게 삶이거든. 놀고, 먹고, 자고, 싸는 거(가끔 애교도 피운다).


물론 인간에게 고양이의 삶을 주입하는 건 무리가 있다. 인간사회를 이루는 인간 개인이 어느 정도의 현실타협이 없으면 '아티스트'가 아닌 '베짱이'로 전락해 낙인찍히고, 경력도 없이 나이든 백수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Lara>에서 고양이의 몸으로 인간의 말을 전달하는 라라는 말한다.


"끝까지 해보라"고.


목표물(쥐돌이 장난감)을 향해서 아무리 힘들어도 눈을 떼지 않으며 물고 늘어지는 고양이, 제 키보다 높은 장애물을 뛰어 넘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인간을 자극한다.

궁극적으로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는 것이 한순간임을 인간이 스스로 느끼도록 한다. 그래, 인간과 고양이가 다른 것은 인간의 철학적 예술적 사고와 행위가 아닌가?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꿈을 찾지 못했거나
꿈을 찾았어도 돈 때문에
답이 안 나오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그대여, 계속 이 상태로 정체될 리 없다. 왜냐고? 99도에서 끓지 않는 물이 100도씨에서 끓듯이, 뜨겁게 꽃이 피어나듯이, 그러한 크리티컬 매스처럼 어느 임계점이 지나면 날개를 펼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지금 지루함이나 빈둥거림의 시간이 지나면 길은 열릴 것이다. 다만 그 길로 통하는 문까지 도달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의 몫이다.

문 앞에 서성이거나 '난 안 돼'하며 뒤돌아 좌절하지 말고, 두드리거나 돌리거나, 회전문이라면 성급하게 밀지 말고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안으로 쏙 들어가거나, 버튼식 자동문이라면 최소한 눌러야 한다. 여기에서 정말 운이 좋으면 누군가 '눌렀을 때' 나는 손대지 않고(두드리거나 누르지 않고)문의 센서가 작동할 수도 있다.


라라는 그래서 '끝까지 해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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