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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Nov 13. 2017

취향에 대하여

취향저격 보다 취향 존중이 좋아요

한참 ‘개취 존중’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도 방영이 될 만큼 트렌드가 되던 신조어였는데, 지금은 일상 언어로 통용된다. 인간이 성장하여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 정립되면 개인에게 취향은 불가피한 주체성의 산실이다.


어렸을 땐 부모나 선생 등의 기준에서 도덕적 관념을 개인의 취향으로 심어주었다면, 다 커서는 ‘취향저격’이라는 마케팅 전략이 개인 취향의 선택권을 알게 모르게 침해한다. 누군가로부터 저당 잡힌 삶을 사는 현대인들, 자본권력과 이해관계 속에서 눈치 보며 사는 사람들은 취향도 온전히 자기 것이 아니거나 진짜를 감추곤 한다. 이 지점을 깨달았다면 과감히 깨뜨릴 필요가 있겠다. 자기혁명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리라.


“취향은 온전히 내 것이라고! 존중하지 못할 망정 선택을 침범하지 마!”

예를 들면, 상남자인 내가 ‘나는 핑크색을 좋아해!’라고 말하거나 실제 스마트기기 액세서리나 폰 색상을 핑크색으로 할 때, ‘남자가 무슨’ ‘이상해’ ‘의외’라는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실례라는 거다.


우리는 남의 취향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 적어도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취향이 아니라면. 그러니 토론에서 취향을 운운하는 건 불필요하다. 취향을 논쟁으로 끌고 오는 순간, 그건 토론이 아니라 수다가 되며, 곧 ‘아무 말 대잔치‘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누군가는 취향을 두고 논쟁을 벌이려 한다. 피해야 한다. 그땐 화장실을 가든 전화를 받든 그 자리를 빨리 떠서 갈등을 예방해야 할 것이다.


허나 이를 제외하고 가까워지고 싶은 사이에서는 상대방의 취향을 알면 좋다. 서로의 취향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다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남녀 사이든 친구 사이나 가족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비로소 ‘사랑’은 꽃핀다. 맹목적인 것과는 다르다. ‘네가 나와 다른 취향을 가졌기에 우린 앞으로 더 재미있는 사이가 될 수 있다’는 전제가 생기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에게는 각자의 취향이 있다. 또 그 취향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개취 존중은 그 ‘언제든 달라질 수 있음’까지 인정해주는 것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같지 않아도 우러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존중’하는 마음은 타인의 ‘취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할 때 진정성 있는 시선으로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대는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성큼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데, 우리 일상에선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화두가 ‘인간관계‘이다. 로봇을 말하는 시대라도 인간은 늘 연구대상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 세상에서 남을 재단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취향의 존중으로 관계는 돈독해질 수 있다. 반대로 어느 조직이나 있다는 ‘또라이’는 이 취향이란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가까이에 없다면, 과연 나는 취향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본 글은 11/12(일) 글쓰기 1일특강 중 20분 백일장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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