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 인간관계론
나는 사람이 늘 어렵다.
위로할 줄도 모르고 공감능력도 뛰어나지 못하다. 과거 사람에게 받아 누적된 상처로 인해 원망보다 외면을 택한 것이다. 임재범의 '비상'이라는 노래의 2절 가사 중간은 이렇게 시작한다.
상처받는 것보단 혼자를 택한 거지
고독이 꼭 나쁜 것은 아니야
외로움은 나에게 누구도 말하지 않을
소중한 걸 깨닫게 했으니까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이젠 세상에 나갈 수 있어/를 외치는 것으로 이 노래의 후렴구는 반복된다.
어렸을 적부터 난 이 노래 가사처럼 어쩌면 불가피한 과정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켜 버려서, 사회 속에서 관계 맺는 것에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다 꾸준히 공유해오던 내 글이 우연히 독자들에게 가닿았다. 행운이었다. 나를 위해 했던 말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에게도 필요한 말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들은 또 다른 나였다. 적어도 글을 통해서는 그랬다.
현실에서 나는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나에게 호기심을 보여주는 사람에게도 적극적이지 못한 편이다. 상대도 내가 지금쯤은 다가오길 바라는 타이밍이 있는데, 나는 딱 그 지점에서 거리를 좁히지 못하거나 끝내는 뒤돌아서기도 한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어쩔 줄을 모르거나 상처받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내 선택, 아니 대부분 그 '관계'라는 '사이'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눈 감아 버리는 '포기'인 거다.
나는 인맥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호감가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도 여전히 서툴다. 오직 먼저 다가와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손을 내밀면 그제야 내 마음이 조금 움직인다. 왕자병에 걸린 것처럼 겉으로는 보이지만 속마음은 거지처럼 가난한 거다.(허용범위가 작으니 여유가 없다는 소리다) 그것도 Yes or No 극단이 되어 결정되기에 상대는 아쉬워한다.
이론적으로는 강의도 가능할 정도로 잘 아는데, 실전은 적용이 잘 안 되는 거다. 다만 그 강의 내용과 같은 이론에 입각한 부단한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현실에 나는 혼자 외로움에도 굴하지 않고 수용하는 걸 담담하게 택한 '척' 살아갈 뿐이다. 이 모든 원인을 트라우마로 뭉뚱그리는 건 맞지 않다고 본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의 정체(stagnation)가 내 정체(identity)의 완성을 좌우한다는 생각이 더 크다. 아직 내 잘못이 아니라는 스스로를 향한 위로와 직면을 덜했기에, 자꾸 언어에 얽매이거나 괜히 나를 거부할 것 같은 두려움에 관계의 유연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모임을 하고 책을 읽어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적어도 관계를 잘 맺는 자가 살아남는 사회적으로는 진화가 덜 된 인간임에 분명하다.
5월 12일(토)부터 개강하는 13기 글쓰기 8주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