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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Sep 22. 2018

함부로 부러워 하거나 존경하지 않겠다

나를 나로서 살게 하기 위하여

지금 돌아보니 예전부터 나는 '부럽다'는 말이나 '존경한다'는 말을 습관으로 했었다. 실은 그렇게까지 부럽거나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위선 없는 가식이랄까. 서른이 넘고부터는 이 말들을 좀 의식하게 되었다. 이게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말이란 걸 알고선 내가 진짜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만의 철학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첫 번째, 나는 여행하는 사람을 그다지 부러워하지 않는다. 나도 국내외 여행을 몇 번 다녀본 사람이지만 가장 좋은 여행지는 우과 우리 동네요, 가장 떠나기 좋은 날은 일상이었다. 예전 일본이나 유럽여행, 국내여행에서의 기억은 피로감이 새로움보다 더 컸다. 이걸 돌아보니,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즐거워하며 다니는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의 정의가 나름대로 조금 다른 거다. 나에게 여행은 낯설게 마주치는 모든 풍경에 더불어 새로운 시야를 갖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방구석에 있어도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이러한 관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선순위가 여행이 아닌 내가, 새로움을 위해 그리고 직접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설렘을 좇아가는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면 무의미하지 않겠나. 남이 하는 여행이 나에게 '부럽다'는 감정으로 와 닿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들의 우선순위, 그들의 관점, 그들의 감정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있을 수도 있겠다. 어떤 '역사적인' 인물을 '역사적인' 공간에서 실제로 만났다거나 '역사적' 경기를 관람했다거나 하는 건 나에게도 우선순위로 작용할 수 있다. 그땐 예외로 부럽다는 순수한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이 글은 여행을 아예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쓸데없이 남의 우선순위에 내 소중한 감정을 소모시키지 않겠다는 말이다. '부럽다'는 말 뒤에 가려진 습관성 열등감은 이제 거두겠다는 말이다.


두 번째, 존경하는 대상을 함부로 설정하지 않으려 한다. 타인의 인격이나 사상, 행위 따위를 우러러 받드는 것을 '존경'이라고 했을 때, 나는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도 존경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겠단 다짐도 불필요하다.


내가 진정 나로서 살기 위해서 외부세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감수성을 느끼는 건 좋은 과정이지만 누군가를 온전히 존경한다는 건 매우 어렵고 낯선 일이 된다. 존경이란 말은 그렇게 가벼운 의미가 담긴 표현이 아님에도 우린 너무 쉽게 남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학교나 사회에서는 존경하는 인물을 묻고, 마치 이순신, 세종대왕, 심지어는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평균적인 답을 알게 모르게 강요한다. 강조와 강요는 다르다. 그건 강요였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가 아니라, 존경한다는 표현에 동의하느냐를 물었어야 했다.


나는 그때도 이동영이고, 지금도 이동영이고, 앞으로도 이동영이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좋은 감정은 아니다. 1등을 존경하거나 유명인을 존경하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존경해야 하는 의무 따윈 없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묻기 전에 학교와 사회는 나는 누구인가를, 나를 사랑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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