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영 글쓰기 Oct 27. 2018

말하기가 어려운 이유

말해도 소용없는 일

난 글로 전하는 게 말보다 늘 편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말하는 것보단 글이 더 편하다. 글은 거듭 수정(삭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만, 말은 만들어지는 순간 주워 담을 수 없어 수습불가로 관계가 틀어지기도 한다. 끝내 어색해지고 흐지부지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말하는 직업(강사)을 나름 가지고서 말로 돈을 벌며 활발히 살고 있다는 사실은, 한편 위태로운 일이다. 두려움의 연속이다. 두려움은 설렘을 언제나 껴안고 있는데, 이것이 주는 특유의 중독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래, 문득이다. 내가 참 말을 안 하고 사는구나 하고 생각한 게. 내가 요즘 글이 아니라 말로 상대하는 사람은  딱 세 부류였다. 가족(특히 엄마), 여자친구, 수강생(청중).

이중 가족이나 수강생은 대화 패턴이 거의 정해져 있다. 글쓰기와 비슷한 수준에서 '예측 가능한' 답변들이 주로 오간다.


현실적으로 진짜 나의 정제되지 못한 생생한 말은 여자친구가 아니면 들을 수 없고, 나 역시 말할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일기에 빼곡히 털어놓거나 담배 or 커피 수다 or 술자리 등에서의 대화로 풀겠지만 난 전부 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 누군가 정제되지 않은 내 말을 기울여 들어줄 것 같으면 조증 상태가 되어 버릴지 모르므로.


프리랜서라 직장생활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말을 듣는 것에 비해 정작 내 말을 많이 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남의 말에 경청을 잘한다는 말은 아니다. 라디오를 다시 듣기 시작했고, 유튜브와 같은 영상매체에서 듣는 말이나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일상 속에서 떠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호적이지 못한 '일방적'인 말조차도 상처가 되거나 어찌 소화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가슴에 오래 남아 다시 묻고 싶지만 현실에선 대부분 지나가버린 말들이다. 입으로 묻지 못하고 가슴에 묻을 뿐이다.


라이브 방송이 훨씬 더 좋지만 편집된 팟캐스트나 녹음방송도 즐겨 듣는다. 그 스피커들의 말이 나에겐 비교대상이 되는 세상의 기준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되어 준다.


어쩌면 유튜브나 팟캐스트, 라디오 DJ, 심지어 목회까지 하고 싶다는 개인적 꿈을 가지는 건 일방적인 스피커로서 그 '권위'의 매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동시에 반대편에서 일방적으로 (주로 홀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감당하는 책임자적 '사명감'같은 것도 있어서일 테다.


말한다는 건 여전히 어렵고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일이다. 말은 언어를 활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많은 언어를 조합하고 반응을 살펴본 사람일수록 잘할 수 있다. 하면 할수록, 혹은 남의 말을 많이 듣고 정리할수록 느는 거다. 듣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글일 수도 있다. 인터뷰집이나 강연록은 비록 편집된 말의 기록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의 장르이기도 하다.


말 중에 가장 은밀한 말은 무엇일까?

나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기도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 감사하다거나 도와달라거나 하는 낮은 수준의 기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높은 수준의 기도에서도 감사나 요청은 반복된다는 것. '응답'이라는 신학계의 전문용어(?)가 있다. 가끔 이 응답이 놀라울만치 온 몸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쉽게 이 같은 사실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다. 이 역시 전문용어가 있는데 '간증'이라고 한다. 종교모임의 공식자리가 아니라면 간증은 듣는 이에게 고역이 될 게 뻔하다. 그래서 은밀한 것이다.


은밀하기에 말의 불편함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누가 뭐래도 기도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누군가에게 하는 모든 말은 은밀한 기도이기도 한 게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세 가지 안 볼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