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히 부캐의 시대를 넘어 '부캐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Mnet 쇼미더머니777)에서 '마미손'이라는 닉네임으로 고무장갑 색의 핫핑크 가면을 쓰고 출연한 이의 실체는 누구일까? 힙알못(힙합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 나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해당 방송에서도 이미 마미손이 지인과 하는 대화를 그대로 내보내 그 복면 래퍼의 실체가 '매드클라운'임이 밝혀진 상태. 그런데 그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핫핑크 고무장갑 가면을 쓴 매드클라운을 더 이상 매드클라운이라 부르지 않는다. '마미손'이라고 말한다. 짜고 치는 부캐인 것이다.
MBC 라디오스타
매드클라운 역시 대놓고 마미손으로 활동한다.(아니라고 말할수록 대놓고 활동하는 아이러니.) 검색창에 '매드클라운'을 검색하거나 '마미손'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마미손 정체’ ‘매드클라운 마미손’이 묶여 나오지만,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즐긴다. 하나의 차원이 또 생긴 것 마냥 현실 세계 속에서 쉬쉬하며 신상 캐릭터로 인정한다.
매드클라운 SNS
‘부캐’의 시대, 그 서막이 열리다
부캐는 (본)캐릭터, (정)캐릭터가 아닌 ‘부’캐릭터를 지칭하는 말이다. 부캐의 유래는 온라인 게임 혹은 커뮤니티 상에서 본래 자신이 키우던 캐릭터 계정 이외에 새롭게 만든 걸(비슷한 말: 부계) 지칭하는 데서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는 개그우먼 김신영이, 45년생 김신영의 둘째 이모 외모(?)와 말투를 가지고 ‘김다비’로 떴다.
여기서 킬포는 '본인 참여'다.
'카피추'는 산에서 내려와 돈에 관심이 1도 없는(?) 순수한 자연인 뮤지션 콘셉트의 캐릭터. 교묘한 카피성(표절) 노래를 기타로 편곡해 부르는 개그맨 추대엽이 내세운 부캐다. 예능인으로 유명한 유병재의 유튜브에서 소개되어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고, 각종 CF를 따낸 기염을 토했다. 오랜 무명생활 끝에 추대엽 자신이 가장 잘하는 노래 개그로 드디어 뜬 것이다. 방송작가 경력이 있어 이 분야에 탁월한 센스가 있는 유병재 기획의 ‘부캐’를 만난 덕분이었다. 자연인이라 표절 같은 건 모른다며 천연덕스럽게 '보고 싶다'를 약간 바꿔 불렀다가, 반응이 좋자 원곡 가수 김범수와 카피추 버전의 보고싶다(보고싶다고 다 볼 수 있다면 이별없는 세상이겠죠)를 듀엣으로 불러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유병재 유튜브-MBC 전지적 참견시점) ...내가 심장이 마구 뛰는 게 공황발작이 아니라 '부정맥'인 것 같다고 엄마가 말했던 게 떠오른다
국민 MC 유재석도 부캐의 대열에 합류했다.그시작은김태호 PD(MBC <무한도전> 연출)와의 합작인 MBC <놀면 뭐하니?>프로그램이었다.대세 장르로 트로트 열풍이 불던 참에 또 무한도전. 졸지에(?)부캐 '유산슬'로 뽕삘 가득한 트로트 가수가 된 유재석은 노래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부캐로서 성공했다.
뒤이어 ‘이효리’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나도 부캐를 가지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치자마자, 실시간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시청자들의 작명 센스로 부캐 ’린다G’가 탄생했다. 한국식으로 바꾸면 ‘지린다’라는 뜻이다. 이효리는 미국 유학 후 미용실 사업이 대박이 나서 미국 전역에 200여 개 지점을 둔 재력가 콘셉트라고 린다G 캐릭터를 설명했다.
MBC 놀면뭐하니?- 싹3, 부캐 콘셉트로 방송하지만 왼쪽 자막에 대놓고 세 사람의 실명이 쓰여 있다
아마 요즘 유튜브나 SNS 클립 영상을 즐겨 보는 세대라면 이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나, 나의 브런치 독자는 그 세대만 있는 게 아니니까. 딱 그제 어머니께 설명해드렸던 그대로를 옮겨보았다.
이와 연관해 내가 3년 차 정도 몸 담은 ‘퇴사학교’라는 직장인 아카데미 플랫폼에서 오프라인 글쓰기 강의를 할 적의 이야기를 해보겠다.[무엇을 쓸 것인가]챕터에서 '방어기제'에 관해 알아두면 글쓰기에 유용할 것이라 일러두고서 덧붙였다.
제 생각엔 앞으로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어떤 형태로든 더 대두될 것 같습니다.
힐링, 번아웃, 트라우마처럼 본래 전문용어였던 '페르소나'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익숙한 일상 개념으로 스며들 때가 되었다고 꾸준히 언급했다.(원래부터도 영화에서 흔히 쓰던 용어로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는 '송강호' 배우다-식으로 자주 쓰이긴 했지만 일상적으로 쓰기엔 다소 낯선 개념이었다.)신기하게도 2019년 4월 BTS(방탄소년단)의 앨범 <페르소나>가 나온 데 이어, 아이유 주연의 영화 <페르소나>가 넷플릭스로 재조명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뛰어 넘은 태도로'나'에 대해 더 집중한다. 자기PR을 넘어 '관종'과 '인싸'가 (유튜버 등)인기 크리에이터의 독보적 키워드가 되어 생존 확률을 높이는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은완전히 감춘 채 부정적 인상을 남기는 '익명'을 반기지 않는다. 그건 왠지 '찌질'해 보이고 힙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제는 각자 주체적인 '나'로 살아가되, 얼굴 혹은 퍼스널리티 정도는 밝히는 '적당한 가면'을 필요로 하고, 그걸 보는 사람도 가면을 기꺼이 즐기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
내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의 분석을 할 수 있었던 건 '2017년~2018년'부터 '나'라는 키워드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동안 <미움받을 용기>, <신경 끄기의 기술>, <나는 나로서 살기로 했다> 등의 베스트셀러가 서점가에서 몇 주 연속 히트를 치는 걸 보고 나는 예측했다.
그다음은 '가면(페르소나)'이 대세가 될 것이다!
멀티 페르소나, 최고 몇개 가능? 멀최몇?
그럴 때마다 나 역시 수강생에게 가끔씩 ‘이동영 작가’ ‘이동영 강사’라는 페르소나로 살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하필 내 이름(실명)으로 해서 사람들이 부캐의 개념보단 실제와 헷갈려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보통 SNS 상 내 글을 본 뒤, 나와 처음 자리를 마주한 분들이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서 보인 반응은 더러 이러했다.
‘작가님이 원래 이런 분이 아니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난 ‘원래 이런 분’이었고, 그가 아는 ‘이런 분’은 내 부캐였다는 점이다. 문득 부캐라는 걸 내 실명과 다른 걸로 만들던지 해야겠단 생각을 (진지하게)하는 요즘이다. 정말 마미손이나 펭수처럼 퍼스널리티를 맘껏 내보일 정도의 가면을 쓰든지 무슨조치가 필요하겠다.
내가 대학시절에 축제 기간 참가했던 모창 대회가 있었다. 난 가수 박상민 분장을 하고 무려 2등을 수상했다. 그때 그 가면 속에서 자유로웠던 희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동영’이라면 해내지 못했을 무대 위의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너스레가 ‘박상민 분장’을 한 이동영에게는 가능했던 거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공감하리라. 그 순간은 정말 짜릿할 만큼 자유로웠다.
그 짜릿함에 중독돼 여전히 강의를 할 때 나는 '이동영 글쓰기 전문 강사'라는 가면을 쓴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무대에서 내려와 홀로 (사회적) 가면을 벗으면 다른 사람, 아니 진짜 이동영 이라는 사람이 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소심하고 내향적인 이동영으로 돌아가는 거다.
가면이란 사람의 본성을 깨우고 개성을 증폭시킨다. 사회화되어 억눌린 자신의 잠재된 끼를 긍정으로 발산해 낸다. 기획과 전략으로 따낸- '주어진 역할극'을연기할 준비를충분히 했고, 캐릭터에 몰입하여 반복하고응용만 하면 된다. 설렘과 긴장 속에서도 든든한 가면 뒤에서 세상 편안함을 느낀다. 그 순간엔두려움이 별 게 아니다.
이 글 제목에 '나도 부캐를 갖고 싶다'라고 했는데, 난 이미 7년 차 강사로서, 또 첫 책을 낸 지 9년 차 된 작가로서 두 개의 부캐, 멀티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이젠 '실명이 아닌 부캐'를 갖고 싶다.사람들이 알아서 눈치를 챙겨주는 그런 부캐 말이다. 아니면 통쾌하게 편견을 날려버려도 좋겠다. 부캐는 존재 그 자체로 이 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품고 있지 않은가. 마치<자기 앞의 생>을 쓴 에밀 아자르가, 알고 보니 로맹 가리였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