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 글쓰기 지도'에 관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는다. 왜 하필 글쓰기일까?
아무래도 코로나 시국에 우리 아이의 여러 결핍된 욕구가 자칫 교육으로 잡아주지 않으면 좋지 못한 방향으로 발현되진 않을까 하는 부모의 절실함이 작용한 탓일 테다. 가정당 평균 한 두 명 정도라 더 귀한 내 자식이 혹여나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건 당연한 부모의 마음이다.
그럼 아이의 마음과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도구이자, 아이가 스스로 니즈를 표현해낼 수 있는 가장 접근성 높은 도구가 무엇일까?역시 그림과 음악과 독서와 글쓰기다. 그중 가장 돈이 들지 않고 빨리 시작할 수 있는 도구는 단연 글쓰기. 부담은 적고 효용성은 있다며 그 가치를 알아보는 현명한 부모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다양한 아이 글쓰기 지도 방법 중에서도 오늘은 '필사(베껴 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눠보고자 한다.
글쓰기 습작 방법은 작문을 하는 작업만 있는 게 아니다. 쓰기 뿐만 아니라 읽기, 즉 독서를 통해서 어휘력과 연상력, 문해력과 표현력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용한 행위가 '필사'다. 필사는 말 그대로 글을 베끼는 거다. 저작권이 보호되는 저작물을 마냥 베낀다는 표절의 의미가 아니다.
보통 필사라 함은 좋은 문장이나 감흥을 주는 문단이나 서사가 있는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적는 작업을 말한다.
성인들도 필사를 여전히 어려워 하지만 그건 이미 다른 글에 다룬 바 있고, 기회가 되면 유튜브를 포함해 이곳 브런치에서 또 다룰 예정이니 이 글에서는 '아이들의 필사'를 콕 집어 말하고 싶다. 우선 아이(초등학생~중학생)들은 필사와 잘 안 맞는다. 자발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글쓰기와 멀어지게 할 뿐이라 나는 권장하고 싶지 않다. 아니 뜯어말리고 싶다.
필사를 해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거 아니냐고?
그건 맞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이동영 작가가 초등학교 때 아무도 안 시켰는데 스스로 했던 필사는 지금의 이동영 작가를 만드는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사는 대부분 아이의 입장에서 굉장히 번거로운 작업이다. 심지어 웬만한 성인들도 버거워하는 게 필사인데 아이들에게 과제처럼 필사를 시킨다? 이건 끔찍한 짓이다.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하며 강요하는 순간부터는 폭력적인 처사가 될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필사를 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싶다면, 아이에게 필사의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동영 작가가 어렸을 적에 왜 필사를 했나 돌아보면 학교 수업에 빠지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그렇다. 나는 공결처리를 하는 방법을 찾다가 필사를 시작했다.
공결처리로 합법적(?)인 결석을 하기 위해서는 교외 백일장에 나가면 되고, 그러기 위해선 교내 백일장을 석권해 학교 대표가 되는 게 유일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아니면 선생님들은 시험 성적순으로만 백일장 출전 기회를 부여해주었다. 난 필사가 아니면 가망이 없었다. 바야흐로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초등학교 때 단 한 번도 스스로 숙제를 해간 적이 없는 문제아(?)였다. 왜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다 보니 수업 시간에 늘 혼나는 일이 잦았고, 그건 자연스럽게 학교에 나오기 싫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늘 "동영아, 네가 시험성적이 좋지 않은 건 괜찮은데 개근상은 받아야 한다. 1등보다 더 중요한 게 주어진 역할(학생)로써 행하는 태도야. 근면 성실한 태도가 가장 으뜸이란다."라고 세뇌를 시키다시피 했기에 무단결석은 결코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했던 짓(?)이 전국국민(초등)학생글짓기대회 수상집을 베끼는 일이었다. 이건 말 그대로 표절의 필사였던 거다.
될놈될이라고 했던가. 이것이 3단계로 이어졌다.
1단계, 수상집에 있는 비슷한 또래의 글 좀 쓰는 아이의 표현력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2단계, 교내 백일장에서 늘 입상을 하여 칭찬 세례를 받아 효능감이 올라갔다.
3단계, 교내 대표로 교외 백일장에 나가 공결처리를 하며 학교 수업을 안 나가도 되는 기쁨을 왕왕 누렸다.
이건 더 베껴 쓸 글이 다 떨어진 중학생 때까지 쭉 이어졌다.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또래의 글을 필사했음에도 꽤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동기'(명분)가 확실했기에 가능했던 필사였다. 내게 필사하라고 떠미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이런 강력한 동기가 없다는 점이다. 과제처럼 필사를 하게 하는 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처사다.
또한 책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 하는 걸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도 아닌 초중등학생들이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작업이다. 그땐 글씨 쓰기 연습부터 하는 편이 낫다. 딱 글씨 쓰기 연습하는 정도만큼만 필사를 하는 것이 좋다.
노규식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는 말한다. (특히 알파세대)아이들은 창작을 하도록 글쓰기를 밀어붙이기보다 손가락으로 뭔가를 하는 것(예: 찰흙놀이, 종이접기, 젓가락질)에 의미를 두어 노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다고 말이다.
어린 이동영은 만화를 즐겨 그렸던 아이였기에 글쓰기 시간이 너무 좋았다. 칭찬도 받고, 내가 은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조의 세계에 푹 빠지느라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두근두근 설렜다. 하나 이건 이동영 작가의 사례일 뿐이니 보통 아이들에게 적용하는 건 곤란하다.
아이들이 글쓰기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필사를 시키는 건 글쓰기를 '과제'쯤으로 인식하며 점점 멀어지게 하니 지양해야 한다. 아이들이 직접 고른 책의 문장을 소리 내 읽고 그걸 반복해 옮겨 쓰거나 단어 혹은 표현을 활용해보는 것이 성취감으로 남아 소소한 재미로 느껴져야 한다. 안 그러면 외우거나 그때만 잠깐 집중하는 척해서 필사를 해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자발적으로 필사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가
글쓰기 접근성을 높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가
새로운 단어와 문장 표현을
자기 것처럼 구사하게
만들 수 있을까?
글쓰기를 지도하는 어른이라면 이러한 고민들을 던져야 한다. 만화책이나 그림책에 나오는 적은 분량의 문장을 베끼는 것부터 해도 좋다. 아예 말로 옮겨 보는 것부터 해도 좋다. 왜 필사를 해야 하는가? 잘 쓰인 단어와 문장들을 고유한 자기 언어로 스며들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마냥 필사를 하면 글쓰기 실력이 늘 거라는 기대감에 필사를 과제처럼 내어 주진 않았으면 한다. 필사에 꽂히지 말고, 눈과 손의 협업으로 뇌 운동에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아이에게 연필로 직접 쓰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되도록 함께 해보자. 새로운 단어, 유사한 단어, 반대말이나 사용 예시들을 찾는 게 유쾌한 느낌으로 남도록 게임처럼 접근해보자. 정답처럼 있는 필사가 아니라 상상력을 동원하는 옮겨 쓰기를 허용해보자.
사실 모든 방법은 그 방법 자체에 답이 있는 게 아니라, 디테일에 답이 있다. 예를 들어, 국어사전을 찾는 일도 어플보다는 종이사전으로 찾아서 '우거지' 옆에 '우거지다'라는 단어를 스스로 익히도록 만드는 디테일이 중요한 법이다.
어른의 입장이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 글쓰기 교육을 해야만이 아이의 어휘력, 연상력, 문해력, 창의력을 높이는 지름길로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http://naver.me/5mYtGm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