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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May 27. 2022

근거 없는 좋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근자감은 자신감만 있는 게 아니다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하다.

요 며칠 새 느낌이 매우 좋다. 신을 모시거나 귀신을 보는 건 아니다. 비범함 없이 살아가는 일개 인간인데, 얼마 전부터, 그리고 하루하루 점점 더 강하게 좋은 예감이 든다.


머지않아 나에게 얼마 전까지 예상치 못한 좋은 일이 '크게' 연속해 일어날 거야
(점점 좋아지다가 3년~5년 사이엔 행운이 폭발할 거야)


'무슨 헛소리냐, 너 많이 외롭구나, 네가 원래 좀 똘끼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주변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다행히도 내 인맥이라 하면 교류가 활발한 편인 가족과 친척, 그리고 5명 내외(친밀하지만 언제든 절교 가능)의 지인 정도라 나를 막 대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이 글의 제목처럼 먼저 말하면 그들은 비슷하게 반응해준다.

좋다.
우리 같이 잘 되자.
네 근자감 너무 좋다.


유유상종이라 하던가.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라 그런 걸까. 내 눈치를 보고 나를 응원하려는 걸까. 이유 어떻든 나도 좋다. 긍정 확언을 따로 외우거나 명상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의식에 온통 '좋은 일이 아주 크게 벌어질 것 같다'란 기운을 가득 채워 놓았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걸 읽는 사람도 덩달아 좋은 기운이 옮아가길 바란다. 아마 이따위 글은 처음 봤을 수도 있다. 근거도 없는 예감을 구구절절 읽고 있다니..! 하고 구독 취소 버튼을 누를까 잠시 멈칫할지도 모른다. 그런 분들에게까지 말하고 싶다. 나 이동영은 훗날 크게 성공하기 전의 나를 구독해준 이들에게 느낀 감사함을 평생 잊지 않을 거라고.(구독 취소하지 말란 소리다)


올해가 호랑이의 해라 운세가 특히 좋다는 호랑이띠인 내가 반응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건 아무좋다. 얼마 전 보았던 시험에 합격을 하든 안 하든 그것도 뭐 아무래도 좋다. 곧 연애를 시작할 것만 같은 예감도 예감에 불과하다. 썸조차 없는 현재다. MBTI - 'I'형의 집돌이가 이런 예감에 근거가 있을 리가. 하지만 혹시 이 좋은 느낌, 공감(짐작)할 수 있겠는가?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는 기분, 어쩐지 아무래도 좋고 잘 될 것만 같은 기분. 보름에 달 차듯 기세가 쭉쭉 차오르는 기운을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을까.(무슨 찬송가 가사 같다)

지난 주말에 썼던 글이 있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을
많이 하자

다짐글이었다. 비록 고되고 힘들지라도 방향만 좋은 쪽이라면 상관없다고 뒤에 적었다. 꿈은 겪어보기 전까지만 꿈이다. 하고 싶은 걸 막상 해보면 별 것 아니라고 느꼈던 경험 다 있지 않은가?


환상일 땐 내가 아는 정보의 한계 때문에 덧씌워진 이미지로 막연하게 뛰어난 느낌이 든다. 막상 실체를 마주하면 진짜 생각보다 별 것 없는 게 현실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면 그대로 또 좋은 일이고.

그러니 자꾸 부딪쳐보고 새로운 걸 보고, 갇힌 나를 깨뜨리고, 실패해보고, 힘들어도 자꾸 해보면서 좋은 방향으로만 나아가자. 효율적이지 않더라도. 당장 수익으로 남는 게 아니라도. 남기려는 전략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전략없이 최선을 다하고 나니 무언가 보상처럼 남았을 때가 살다 보면 더 많은 법이다.

세상의 상식과 나만의 규정이 적정한 균형을 이룰 때 '좋은 방향'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더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을 겪었던 과거가 나는 오히려 좋다. 나를 하루라도 빨리 떠나가 준 인연들이 나는 오히려 좋다. 오히려 좋다는 요즘 유행하는 말이 오히려 좋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엔 특정한 정답이 없다. 그것이 계속 살아가겠다는 의지 위에 찍히는 방점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단순하게 스카이 다이빙을 하든, 번지점프를 하든, TV 오디션에 나가 노래를 불러보든 말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은 장래희망이나 꿈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다. 동시에 자주 바꾸고 바뀌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경험하는 자기(experiencing self)와 기억하는 자기(remembering self)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우리에게는 현재 순간을 경험하는 자기와 나중에 그 경험을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새롭게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가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자기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다.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만족과 기분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삶 전체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최인철,  <굿 라이프> p143


그래, 경험하고 기억하고,
경험하고 기억하자.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단,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을 많이 하려면 조건이 있다. 일단 살아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가령 누군가의 죽음을 느끼는 장례식장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부디 장례식장에 가는 일은 적었으면 좋겠지만.

개인에 따라서 돈이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 없기도 하다. 준비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지금 당장 시작할 수도 있다. 어떤 단체에 신청서, 지원서 따위를 내야 할 수도 있다. 평가는 다 뒤따를 것이니 충분히 사유해두어야 한다. 그러나 살아있음을 느끼는 공통 조건은 하나. 


부딪쳐 경험하고
기억해 성찰하는 것의
반복일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면 만약 합격의 당락 앞에 놓여 있다 해도 결과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을 것이다. 합격으로 기쁜 순간도 불합격으로 잠시 시무룩한 순간도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로 정립되진 않는다. 다음 경험과 성찰을 향해 나아갈 뿐. 더 중요한 걸 잊지 않는 태도로 살아가게 된다.

무엇에 함부로 얽매이지도 않는다. 매달려 나를 잃어간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날 배짱을 발휘해낸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삶의 추구는 노력하게 만든다. 움직이게 만든다. 리액션(+호응)을 유도하지만 역시 남의 평가에 일희일비 하거나 좀처럼 휘둘리진 않는다.

기대와 달리 잘 안 됐을 경우에도 실망, 좌절이나 우울함을 크게 수반해 빠질 일도 없다. 그건 살아있음을 느끼고 좋은 예감을 관철해 가는데 별로 중요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합격하면 좋고, 안 도 그 도전으로 난 이미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셈이 아닌가. 또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내 철학을 놓지 않은 채 무해하고 선한 영향력을 지향하면서.

그렇다. 이런 태도를 갖고 살기로 다짐하니 근거 없이 잘 될 것 같은 이 좋은 예감은 온통 나를 덮쳐 버렸다. 30도가 넘어가는 한 여름, 올리브영 매장에 들어갔을 때 언젠가 느꼈던 체감온도 18도의 에어컨 바람처럼 기분 좋게 나를 덮쳤다.

내가 오롯이 나로서 내 규정대로, 내 멋대로, 내 해석대로 세상의 상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살기로 한 건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뻔해 보이지만 실천하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진다. 많은 결과가 다가오고, 결과 자체는 나를 흔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자격증이나 이력서 한 줄로 검증되지 않아도 무관한, 통장에 일일이 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아도 무관한, (그러나 찍히면 배가되는) 그런 삶의 태도는 내게 좋은 기운을 불러주고 있다. 행운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삶을 이렇게 재정의하고 살면 기회는 평생에 세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찾아온다.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 당신기대나 평가와 무관하게 난 오롯이 살아있을 테니까. (응원해주면? 감사하고요.)


https://linktr.ee/leedong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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