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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뿐인 삶은 짧다.

축하받기에도 한탄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실행하기에도.

by 이동영 글쓰기
p.31
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중에서

교회에서 깜짝 생일축하를 받은 저자는 생각했다. 내 언어로 바꿔보면 이렇다. 야 너두? 응 나두.

앞으로도 고통일 것이 자명한 인생에서 실존적 부조리 따위 잠시 벗어던지고 이왕 태어난 같은 처지에 우리 어화둥둥 같이 살아가는 거라고. 그러니 일단 축하는 받고 보자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시작된 생은 오로지 내 의지로만 관철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전 인류의 공통된 전제가 서로 함께할 명분이 된다고 말이다.

통과의례는 아니지만, 누구든 생애 한 번 이상은 '생일 축하'라는 의례를 받아보았을 것이다. 회귀물이 유행하는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 생은 망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은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과 성립될 수 없다. 생은 한 번 뿐이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유일한 평생의 미션일지도 모른다. 일단 이번 생 다음 생 하고 순번을 매길 수 없을지도 모를뿐더러, 망했는지는 끝까지 살아봐야 알기 때문이다.

<이태원 클라쓰>라는 드라마가 있다. 교도소에 수감된 채 홀로 공부를 하는 박새로이에게 누군가 다가온다. 다가온 수감자는 어차피 사회 나가서도 전과자로 살 거라며 비아냥댄다. 박새로이는 말한다. "공부? 노가다? 원양어선? 그렇게 시작하면 돼. 필요한 건 다 할 거야.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내 인생 이제 시작이고. 난 원하는 거 다 이루면서 살 거야." 이번 생이 망했다는 사람 중에 전과자만큼 현실적으로 좌절할 이가 또 있을까? 물론 웹툰이고 드라마라고 하지만 대중에게 인기를 얻은 드라마 캐릭터는 지금 사회에 세대 계층의 막연한 이상과 현실을 반영한 집약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다시 태어난다면?"이란 질문을 던지면 돌아오는 상당수의 답이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데요."이다. 그러면서도 회귀물에 환호한다. 현실은 실전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이상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바람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단 한 번뿐인 삶인 것을.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인정해야 하는 삶인 것을.

내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내던진 이상 단 한 번만 이 고통을 견디고 살아가면 된다. 대박이 무엇이며 망한 건 무엇인가. 그저 끝까지 살아가면, 살아내면 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일을 포함한 모든 날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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