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책 추천 겸 독후감
어떤 상황에도 자꾸만 겸손을 떠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애narcissism가 굉장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저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은 겸손할 수준도 안 되는 사람의 겸손은 건방이라 하셨지요. ‘내가 이렇게 큰일을 했는데 왜 사람들이 존경을 표하지 않지?’ 하는 식의 과도한 자기애와 욕망을 직접 드러내기엔 너무 위험하니, 이를 정반대로 표현하는 방어기제, 즉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에서 비롯한 것이 겸손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겸손을 표해도 될 만큼의 대단한 뭔가를 정말로 해내고 나서야 그때 비로소 겸손해지면 됩니다. - 본문 중에서
‘겸손은 힘들어’라는 노래가 있다. 예전에는 시건방지게 들렸고, 또 어떤 때는 자존감 높은 사람이 부르는 노래처럼 들렸다. 똑같은 가사도 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자존감은 고정값이 아니다. 내 주변 사람, 감정 상태, 최근 성취, 통장 잔액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 누군가 나를 칭찬하면 ‘감사합니다’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예전에는 조금만 칭찬을 받아도 손사래를 치고 얼굴이 붉어지며 눈을 피했지만, 이제는 날 칭찬한 상대의 센스를 칭찬하는 여유까지 있다. 자존감이 높은 시기라서 그렇다. 물론 내일은 또 다를 수 있다.
나도 아직 나를 잘 모른다.
직업 특성상 글로 나를 드러내고, 대중 앞에서 강의를 하는 내게 위안이 된 구절이 있었다.
'자신만 아는 자기'와 '타인에게 보이는 자기'가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한다면, 그게 자존감 높은 사람의 특성이라고 오해한다면, 이 생각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 본문 중에서
이 부분에서 특히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을 긍정하는 시선이 인상 깊었다. 너 잘하고 있어, 네가 옳아-에서 그치지 않고 더 구체적으로 일러주는 문장이었다. 책은 여러 가지 ‘척’하기를 제안한다.
• 자기 삶에 충분히 집중하는 ‘척’하기
• 중립적인 이야기에도 과잉 방어하고 정색하는 패턴을 부디 억제하고, (설사 마음이 불편해졌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 불편한 상황에서 유머로 적절하게 받아치는 ‘척’하기
• 혼자 밥을 먹거나 홀로 있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척’하기
• 실패나 성공의 가능성이라든지 주위의 평판에 초연한 ‘척’하기
• 마지막으로, 모든 일을 일일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드러내지 않기
이런 '척'은 어느 순간 여러분에게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가면'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
많은 책과 미디어가 ‘나다움’을 찾아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라’만 강조한다면, 이 책은 ‘가면을 써도 좋다, 척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 당위성을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으로 설명해 주니, 오히려 불안에서 자유로워졌다.
드라마 <안나>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가 불행하면 자꾸 타인에게 관심이 생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비참해지고 교만해지는 걸 알면서도 비교를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타인의 모습은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그걸 라이브로 사는 내 삶과 비교하면 당연히 불행해진다. 책은 ‘민낯이 아닌 나’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느낀 점은 우리가 스스로 분류된 소속으로 들어가고자 욕망한다는 것이다. 혈액형, 별자리, 출생순위, MBTI, 에겐/테토의 분류는 시대만 변했을 뿐 그 분류 속에 자기와 타인을 구분하면서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사회적 역할마다 다른 가면을 쓰는 나는 과연 어느 하나에 속하는 1인이 될 수 있을까?
만약 INFP인 사람에게 MBTI 전문가가 (유료 정밀 검사 결과,) "지금까지 잘못 알고 계셨네요. 검사 결과를 보니 ENFJ에 훨씬 가까우신데요."라고 말했다면? 난 검사지를 받아 든 사람의 향후 1년 뒤 모습이 변할 수도 있다고 본다. 어떤 정상의 테두리에서 분류되어 비슷한 집단이 있는 곳에 소속해 있다는 안도감으로 하나를 규정해 살지만 우린 다 문제가 있고, 가면을 쓰고, 상황과 역할에 따라 잘 적응하며 살고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나를 '아직'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후회는 줄어든다. 나를 알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든 가면을 쓴 모습이든 결국은 나임을 인정하도록 해주는 이 책의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 자존감이 올라가서 겸손이 좀 힘들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