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이별을 탓할 생각은 없다
이 글은 내가 연애를 안 하는 이유 내지는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매번 연애가 힘든 이유’를 생략된 이별과 실제 이야기를 빌어 적어보려 한다.
소위 주위 선수들로부터는 '연애고자'라고 불리는 나도 고백을 받은 적이 있었고, 연애를 한 적도 있었고, 썸도 탄 적이 있었다. 근데 왜?
그때 그 이별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군산 고향집에 있는 스케치북을 찾는다면 찍어서 올리고 싶은데, 대학시절 타 과의 미술치료 수업을 수강하며 그렸던 그림에 그때 그 이별에 대한 장면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그림 주제는 '어렸을 적 가장 강렬했던 장면'이었다.
흔적과 같다. 애써 지웠지만 남아있는 기억.
초등학교 1학년, 키가 작아서 맨 앞자리에 앉았던 나는 불과 1학기도 끝마치지 못했을 무렵 짝꿍을 잃었다.
내가 미술치료 시간에 그린 그림은, 지각생 이동영이 뒷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까만 커텐이 쳐져있는 분위기 싸한 교실에, 내 자리 옆에 놓여진 조화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 앞에 서있는 담임선생님의 흐느낌과 아이들의 훌쩍임이 각인된 장면의 스케치였다.
미술치료 작품에는 제목이 매우 중요한데, 그 그림의 제목은 '상실'이었다.
나는 그때 그 이별을
탓할 생각이 없다.
물론 탓할 일도 아니다.
담임선생님의 말로(내 기억에)내 짝궁은 언니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도로를 건너다 대형트럭에 변을 당했다고 했다. 나는 집까지 늘 도보로 하교했는데, 늘 대형트럭에 그 아이의 분홍드레스가 걸쳐져 있을 거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으로 그리워했던 기억이 난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그 아이는 소심한 날 옆에 두고 새근새근 잘도 웃던 친구였다.
목소리나 여타 다른 특징은 크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다른 짝꿍과 혼동이 되는 지 그 아이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맞는 거 같다. 진짜 애기애기한 눈웃음이 천상 어린 꼬마숙녀였다.
그 후 나는 누군가 내 옆을 떠나는 일이 내 의도와는 무관하며 또한 날 떠난 이의 의도와도 무관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직시했던 것 같다. 그건 느낌이었다. 누구도 영원한 관계로서 내 옆을 지켜주거나 내가 지켜주거나(지켜주는 것이 아니더라도)늘 항상 언제까지나 함께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아마도 처음 깨달은 것이다.
다시 말해,
대상의 영속성이 깨진 것이다.
그건 관계의 법칙이었다.
관계의 믿음이 깨진 후에야 초등학교 1학년 이동영의 마음 속에 아로 새겨진 법칙.
시간은 중학생 시절로 흘러간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장수집안이라 증조할머니도 100세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한 번 더 제대로 죽음에 대하여 실감할 수가 있었다. 평소 부모님의 지론대로 자주 찾아뵈어 날 정말 좋아하셨는데, 돌아가실 즈음 할머니가 날 그토록 찾았음에도 나는 토요예배를 가느라 몇 주 못 찾아갔다. 그 사이 위독하셔서 눈을 감으신 거다.
내가 찾아 뵀을 땐 아직 숨이 있는 상태에서 눈을 감고 누워계시는데 임종 직전이었다. 마지막 할머니의 콧구멍이 커지는 순간까지 숟가락으로 물을 떠드리며 보내드릴 수가 있었다.
호상이었다.
빨리 가고 싶다고 늘 중어리시던 할머니께서 딱 100세가 되던 해에 편안히 눈을 감고 돌아가신 것이니까 어른들은 하나같이 '다행인 죽음'이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어머니의 시월드 이야기는 차치하고, 내 기준에서만 볼 땐 정말 다른 친척동생들과 차별할 정도로 끔찍히 날 좋아해주셔서 박하사탕과 꼬깃한 지폐돈을 손에 꼭 쥐어주시던 증조할머니셨다. 정작 나를 찾으실 때 뵙지 못해 너무 죄송스러웠다.
난 이처럼 이별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사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떠나갔다.
이별에 익숙한 사람이 어디있겠나만은 이것이 연애를 안 하는 이유로 이어지는 논리에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 누군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 두렵다.
순간적 착각과 환상의 산물인 사랑하는 감정보다 더 큰 그 두려움이 함께이던 나를 혼자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혼자가 마냥 좋다거나 편한 건 결코 아니다.
오프라인 모임도 만들고 운영할 정도인데 뭘.
다만 둘이라는 관계가 다소 불편할 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돈으로 살 수만 있다면 감정만 쏙 사고 싶다.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다. 솔직한 고백이다.
기꺼이 내게 상처를 주어도 좋을 사람을 마음에 허락하는 일은 이제 나에게 너무 사치가 돼 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것이겠다.
내가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는
'떠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라는 것.
(하, 혹시라도 상대가 바람을 핀다면 내 삶은 한없이 심각해지고 말 것이다. 그건 나에게 분홍드레스를 두리번 거리게 만드는 그때 그 대형트럭과 같은 것이니까. 그건 받아들임의 영역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쳐나오고 말 것이다. 그땐 내가 이러려고 연애를 시작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어 괴롭겠지.)
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사랑을 시작해 만나는 건 정말 웃긴 일이지만,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 더욱 허무하고 두려운 것과 같이 이별에 대한 순응이 없다면 새로운 만남도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이 두려움을 깰 사람이 내게 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