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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Feb 21. 2017

살고 싶어질 때

살기 싫다라고 쓰다가 제목을 고쳤다.

글쎄, 나는 나에게 하는 말을 쓰고, 사람아, 너의 꽃말은 외로움이다라고 쓰고, 당신에겐 당신이 있다라고 쓰는 글쓴이다. 자칭 작가. 그러다보니 타칭도 작가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 내가 소소한 자타공인 영향력을 가지고 글을 쓰면 그 영향력이 과연 '선해야만' 하는가 하는 본질적 물음이 든다. 내가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작가가 되자-라고 다짐하여 발표한 게 아닌 이상, 선하지 않더라도 독자가 부여해준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는 거다. 독립적인 주체로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래 

나는 오늘 살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소름돋게 이 글이 유서나 이런 건 아니다. 유서라는 말은 군대에서 시로 쓰다가 크게 데인 바 있어서 단어 자체에 거부감이 있다. 유서 아닌 유서도 아니다. 그냥 살기 싫어졌다는 정리된 쓰레기 같은 나의 감정 고백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내가 말했을 때, 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저기 저런 글을 쓰며 버티려고 하는 구나, 저렇게라도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위로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 나만 찌질하지 않고 나만 힘든 게 아니고 나만 버티려고 아등바등 거리는 게 아니라는 인간적 위로. 그럼 겉보기엔 더러운 문장같은 이것은 선한 영향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답이 있는 물음은 아니다. 그냥 생각해보는 거다. 

나는 오늘 살기 싫어졌다- 라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한 번 더 숨쉬게 되는 작가의 숙명을 아는가? 

그렇게 나에게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 결국 두 사람 이상을 살게 하는 끄적임이 되는 것이니까. 


카톡의 친구목록을 정리하다가, 사람인에서 채용공고를 보다가, 직방에서 방을 알아보다가, 거리에서 높은 빌딩에 들어가는 고급 외제승용차를 보다가, 걱정 가득한 엄마의 전화를 받다가 문뜩


나는 오늘 살아있는 게 싫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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