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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Mar 13. 2017

짧은 글에 대한 오독의 여지에 대하여

이 작가가 소심해서 그럽니다.

소위 SNS 시인이라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공간은 긴 글을 담아내기도, 그것을 읽어내기에도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길이는 짧고 해석은 열린 모호한 글들이 유독 인기가 많다. 모호한 글이라 함은 반복법이나 언어유희와 같은 말장난으로 독자들에게 열린 공상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 상상은 대개 관념적으로 깊게 들어가진 않는다. 시각적으로 읽히는 그대와 그때, 같이와 가치, 이런 건 딱 그정도로 해석되고 말지만 그러한 표현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내가 쓰는 글은 반복법이나 언어유희가 양념이 되긴 해도 주재료가 되진 않는다. SNS시인의 흔한 작법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내 글은 오랫동안 이동영 작가만의 글일 뿐이지만- 잘 모르는 누군가는 이를 두고 '아류'라고 말하기도 한다. 먼저 유명해지고 선점하면 그 전부터 지금껏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까지 전부 '아류'가 되는 세상인가? 뭐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들을 표방한 적도 없고 유명과 선점이 내 글의 주요 가치가 되지도 않으니 그런 평가는 개인적 생각이라고 치부하려 한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SNS에 올리는 '짧은 글'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가끔 내가 쓰는 짧은 글에 대해서도 피드백이 온다. 대개는 '공감이 된다'는 글이지만, 가끔은 오독인 경우도 생긴다. 여기서 독자의 오독이라고 전제할 수 있는 건 작가로서 자존심으로 명확한 입장없이 글을 내놓진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생각이 다르다'거나 '공감이 안 된다'는 건전한 판단일 뿐, 오독과는 구분된다.)정말 잘못된 글을 썼다면 그건 절필사유가 될 지도 모른다. 작가가 오독의 여지를 준 것은 좋은 문장이 아닐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독자가 오독을 하지 않고, 오독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펼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의 입장을 쉽게 거둘 수는 없다. 작가가 자신의 글을 쉽게 포기하는 건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기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쉬운 포기에 대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네 가지는 이거다.

첫째는 글의 길이가 짧아서 생기는 오독의 여지.

둘째는 작가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에서 생기는 오독의 여지.

셋째는 독자 vs 작가의 우열의 기준에서 생기는 오독의 여지.

넷째는 독자 혹은 작가의 무지에서 생기는(동일한 해석을 하고 있음에도) 오독의 여지


어쩌면 독자가 작가에게 '지금 잘못된 글을 써서 주장하고 있다'고 말해도 크게 할 말은 없는 게 작가의 입장이 된다. 숙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가 책을 내는 순간, 그건 독자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평가에도 감히 충고할 수는 없다. 다만 설명을 요구할 때 작가가 쓴 글의 입장을 설명을 할 수는 있는 것이다. 충고나 해명과는 다르다. 오독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문제라면 글의 길이가 짧았을 때 생기는 독자의 틀린 해석의 여지가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때에 있다. 독자는 작가에게 피드백이라 쓰지만 충고라고 읽힌다. 작가는 독자에게 설명이라 쓰지만 충고라 읽힌다.


두번째는 작가의 명성과 같은 권위에 따른 오독의 여지이다. 권위에의 복종으로 인해 '저만한 유명작가는 뭔가 더 깊은 뜻이 있겠지'하고 글이 어쨌든간에 일단 넘어가보는 오류이다. 실제 뭔가 더 깊은 뜻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유명하지 않은 작가와 대비되는 무명작가의 글에 대한 해석의 여지에 있는 것이다. 작가를 만만하게 보는 독자는 조금 참을 수 있겠으나 작가의 글을 만만하게 보고 작가에게 덤비는 독자는 용서할 수 없다.


세번째는 이런 질문에 기인한다. 독자보다 작가가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영향력을 가졌다는 건 독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영향력의 크기가 상황에 따라서는 작가가 더 클 수도 있겠지만, 많은 독자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작가는 정말 외로운 존재다. 자신의 글을 두고 생각해 본 독자 한 명을 쉽사리 무시할 수 있는 작가가 세상에 존재할까?


사실 짧은 글이든 책 한 권이든 독자가 작가에게 글을 두고 해석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소통의 관계를 가져가는 것이라기보단 서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짧은 글은 작가 입장에서 억울한 측면이 더 많다.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신뢰도 높은 작가로서 더 크게 성장하지 못한다. 찌질하게 일일히 다 변명같이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작가의 입장에선 자존심 상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가만히 오독을 오독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정당한 자존심의 문제다. 독자의 오독보다 오독을 잘못 주장하는 것을 보면 작가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그럼 오독에 대한 개념적 정의도 작가에게는 필요하다. 작가의 글이 언제나 옳다고 볼 수도 없으니까. 단 한 명의 독자라도 불편함을 느꼈다면 존중해야 한다. 부정할 수 없이 작가의 잘못이다. 그래도 '오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까지 가만히 있는 것은 그 독자의 피드백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을 안고 다음 글을 쓰고 공유해야 하는 작가의 입장이 서글프다. 작가는 그것을 감내할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한 명의 독자는 그 영향력보다 과연 못한 것일까?


독자의 다양한 생각을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 영광된 일이다. 어쨌든 읽고 어떤 감정으로든 해석하려는 의지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느끼는 감정(불편함)이 글이 잘못 쓰여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있어서 트라우마와 같은 걸 건드린 결과의 감정일 수도 있다는 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독자 혹은 작가의 무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이 분명히 잘못된 팩트를 가지고 주장하거나 혹은 결국 둘 다 똑같은 해석의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괜한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이다. 전자는 명확히 한 쪽의 잘못이지만 후자는 개념의 정의가 서로 다른 인생의 경험에 기인한다. 짧은 문장에서는 한 단어 한 단어와 문맥상의 흐름, 행간의 의미가 지금까지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이 개념들을 해석해 왔는지 살아온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답은 상식에 있다. 상식의 기준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아이러니를 존중해야만 하지 않을까.


한동안 짧은 글귀를 올리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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