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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Mar 24. 2017

'좋아한다는 것'

햄버거 마니아였다니, 내가..!

나는 햄버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에 답변 리스트로 '라면', '탕수육' 등은 있지만 '햄버거'를 굳이 말할 생각이 없는 정도?

먹으면서 맛있다며 아드레날린이라든지 혀르가즘이라든지 감탄이나 감동을 통해 행복하다는 다이돌핀을 내게 생성하는 음식메뉴는 아님에 분명하다. 그러니까 '좋아하긴 하는데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말과도 조금 발상의 개념이 다른 것이, 다음의 단상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을 듯하다.


최근 주 사용(체크) 카드와 연동된 은행 어플 기능을 눌러 소비지출내역을 살펴보니, 지난 1년 간 내가 거의 2~3주에 한 번 꼴로 햄버거를 자주 사 먹었던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지금은 빅데이터로 가장 집중되거나 잦은 패턴을 분석해 곧 선호도로 결론을 내곤 하는 세상이다. 다수의 선택과 집중은 사회적 흐름을 파악하는데 유의미한 현상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햄버거 =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떨어지는 메뉴가 아니라고!


그럼 뭔데?


미처 인지도 못할 정도로 이토록 즐겨먹었던 건 '햄버거라는 음식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혼자 식사를 해결하기 편해서'란 이유가 가장 주요했다.(수제버거 가게부터 버거킹, KFC, 파파이스, 맥도널드, 맘스터치 등등- 버거 맛이 아니라 화장실이 더 특화(?)되어 있다는 롯O리아 마저 자주 갔다.)


그러고보니 어제와 오늘도 먹었다(좋아하진 않는데)


우리가 흔히 어떤 대상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를 떠올려본다. '편안함'이라는 요소가 이유로서 강력하게 작용할 때면 아무리 평소 즐겨찾기를 하는 대상이라도 '좋아한다'는 말을 굳이 하는 법이 없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 우정하는 남녀 사람 친구의 차이랄까?(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빅데이터도 이에 따른 현상을 해석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는 이유가 있다. 햄버거를 가장 많이 먹는 나를 보고 추측하기를 단순히 '햄버거라는 음식을 좋아해서'라고 한다면 1차적 분석에서 끝난 것일 테다. 내가 '1인 가구'이고, '혼자 음식점에 자주 가며'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의 입맛을 가지고 있다 정도의 변수 요인을 함께 분석했다면 '선호도'라는 것에서는 단순히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아니라, '혼밥 하기 편한'선호 메뉴로서 결과가 도출되었다고 해석할 듯싶다. ( 빅데이터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 글에서 오류가 있으면 댓글로...)  

좋아한다는 것,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주 찾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게 이 글의 결론이다.

호감이라고, 사랑이라고 쉽게 착각하지 말지어다

내가 그동안 유독 자주 찾은 사람도 '좋아해서'가 아닌 것이고, 매일 출퇴근하던 회사도 '좋아해서'란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결론. 심리학 연구결과 중에는 자주 보면 좋아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도 있던데, 그 착각으로 자주 찾는 대상이 날 옭아매고 짜증 나게 할지라도 버틸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것이 선행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된 것인지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할 듯싶다.

뭐, 실제로 좋아하게 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땐 '착각' 혹은 '환상' 내지는 '미친 현상'이라고 감히 정의 내리고 싶다. 여기에서 미친 현상은 비정상이란 의미로서가 아니라, 어떤 대상에 '미친다'(몰입해서 빠져든) 마니아적 덕질 현상을 일컫는다.


우리는 즐겨 찾을수록 익숙해진다. 그것이 연인, 가족, 친구일지라도.

클리셰가 되어 버린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말은 내게 늘 불편함을 준다. 익숙함의 깨달음은 단지 소중함을 잊게 하는 속임수가 아니라, 내 삶을 버티게 하고 문득 낯선 것을 마주칠 때마다 빠져 나와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기에 그 익숙함 자체가 나에겐 소중하다. 좋아하고 사랑하고의 감정은 솔직히 아닌데, 고마운 것이다.

마치 내가 즐겨찾는 안경같은 존재말이다. 난 안경을 안 '좋아'하니까. 날 편안하게 하기에 ‘필요’한 것이다.


나는 좋아하다, 사랑하다의 단어는 순간적 단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간을 꽤 오래 유지하고 있다면 그 단어를 버티는 착각이라는 현상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 착각 중에는'편안함'이라는 요소가 '미안함'•'고마움'으로 감춰져 있다. 사람을 두고 즐겨찾는 이유를 '유익해서'라고 말하면 그래도 덜 나빠보인다. '유용해서'라고 말하면 나빠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만,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는 결코 순수하지가 않다. 순수하게 믿을수록 쉽게 당하는 호구가 되는 거다. 마냥 순수한 사람끼리만 만난다면 역학관계에 민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우리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로움'이나 '심심함'이라도 채워줄 상대, 내가 정으로든 역으로든 전이하거나 투영할 상대, 위로하거나 위로 받는 상대적 우열급수를 무의식적으로라도 따져보며 상대를 찾는 것 아닌가. 우리의 흔한 관계를 따져보면 이 중에 하나 이상 쯤은 어렵지 않게 포함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사랑을 믿는 사람들을 존중한다. 부정하려는 의도는 없다. 나같이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거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과 '즐겨 찾는 것'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볼 계기가 되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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