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숨겨도 몸은 말한다.
1. 직딩 2년차 큰딸아이가 출근길에 가족카톡방에 카톡을 올렸다.
"지하철 내렸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하더니 앞이 아예 안 보일 정도로 어질어질하고 눈이 자꾸 감기고 온몸이 마비된 기분이고 숨도 잘 안쉬어졌삼.."
2. 갑작스런 카톡에 와이프와 난 걱정이 되어 계속 연락을 했는데 다행히 아이는 10분 정도 앉아 있다가 괜찮아져서 사무실에 잘 출근했다고 한다. 처음 있는 일이어서 와이프와 난 너무 놀랐다. 와이프는 아이 건강이 걱정되었는지 저녁에 퇴근하고 병원 가서 비타민 수액을 맞히자고 했다. 최근 회사에서 부서를 옮기는 바람에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다가 집으로 이사짐 싸들고 들어왔고 출퇴근도 10분 거리를 자차로 다니다가 아침저녁 30분씩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해서 몸이 많이 약해졌을 거라면서...
3. 퇴근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고 24시간 병원에 데려갔다. 주로 밤에 체할 때 급하게 찾는 병원이다. 그런데 의사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이가 아침에 겪은 일을 듣더니 의사는 대뜸,
"공황장애네요. 앞으로 지하철 타고 다니지 마시고 가급적 혼자 다니지 마세요."
4. "엥? 공황장애? 연예인이 간혹 걸린다는, 말로만 듣던 그 공황장애?"
와이프와 난 뜻밖의 단어에 놀라면서 혹시 다른 원인이 있지는 않는지, 예를 들면 아이가 저혈압이 좀 있는데 그런 이유는 아닌지, 요즘 이사도 하고 부서도 옮겨서 피곤해서 그런 건 아닌지 등등을 물었다. 그러나 의사는 "뭐, 피검사를 해봐야 하지만 피검사해서 아무 것도 안 나오면 공황장애라고 봐야죠. 증상이 딱 공황장애에요. 정신과 가서 추가 검사 받으셔야 하구요."라고 말했다.
5. 공황장애에 걸리면 밖에 나가기도 겁나고 사회생활도 쉽지 않다고 하는데 맞나? 불안증세가 심하다고 하던데 우리 아이는 불안함을 내비친 적은 없는데...?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나는 아이가 수액을 맞는 동안 옆에서 검색을 해 보았다. 챗GPT에게도 물어보고. 다행히 공황장애는 이렇게 한번 증상이 나타났다고 판정되는 것이 아니며, 공황발작일 수도 있고 기립성 저혈압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6. 수액을 다 맞고 피검사가 끝나 다시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여전히 아이와 나에게 "피검사해도 이런저런 수치가 정상이에요. 스트레스가 아주 심한 것 같네요. 공황장애라고 봐요."라고 말했다. "지금 아이 상태를 보면 그렇게 공황장애라고 거의 단정할 만한 건가요?"라고 물었더니 "네, 다른 이유는 없어요. 증상이 공황장애 증상이에요. 피검사도 깨끗하고. 당분간 지하철 타지 마시고, 혼자 다니지 마시고 스트레스 관리 잘 하시고."
7. 너무 단정적인 의사의 말에 아이가 혹시 놀라지는 않았을지, 스스로를 더 불안함으로 끌고가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우리 동기오빠도 비슷하게 어지럽고 호흡이 가빠져서 요즘 신경안정제 먹고 있데. 그 오빠도 최근에 부서를 인천에서 광화문으로 옮기고 12월 결혼 준비하고 이사도 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좀 심하데. 그래서 신경안정제 먹고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도 줄 수 있데. ㅋㅋ 그리고 다른 선배언니도 얼마전에 지하철 타고 가다가 너무 호흡이 가빠지고 힘들어서 내렸는데 자기는 열사병 걸린 것 같다고 해."라고 말했다.
8. 공황발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트레스로 인해 호흡이 가빠지거나 몸이 힘들어지는 경우는 종종 있을 수 있다는 검색 결과가 생각났다. 아이는 요즘 정말 많은 일을 겪고 있다. 최근 부서를 운영팀에서 재무팀으로 옮겼는데 사실 재무를 해본 적이 없어 매일 스터디하고 있다. 주말에도 노트북을 들고와 엑셀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 혼자 오피스텔 살다가 집으로 들어오느라 이사도 직접 했다. 자차로 10분 걸리던 출퇴근이 지하철로 바뀌었다. 돌아보니 정말 많은 일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아이는 '자기는 스트레가 없다'고 한다.
9. 몸은 정직하다.
내가 꽤 오래전 L그룹에서 D그룹으로 옮겼을 때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옮긴 회사는 어때?" 난 대답했다. "정말 재미있어요. 아침에 출근이 기다려져요." 정말 그랬다. 난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일을 하는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렇게 말하는 나의 입술은 퉁퉁 부르터 있었다는 것이다.
10.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종종 말하지만 여전히 몸은 정직하다. 배신하지 않는다. 힘들면 몸이 반응한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몸이 우리에게 신호를 준다. 우리가 몸의 소리에 귀기울여하는 이유이다. 특히 이직이나 이사, 부서이동 등등 변화를 겪고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몸에 신경을 써야 한다.
11. 다행히 아이는 너무 놀라는 눈치는 아니다. 주변에 비슷한 것을 겪는 사람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아이에게 조금씩 새로운 부서에 적응하고 출퇴근도 적응하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신경을 좀 써야겠다. 아이가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고 몸이 건네주는 신호를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